제15화
이혜정이 차가운 눈빛으로 이운해의 얼굴을 응시했다.
병실 안의 온도가 한순간에 확 내려갔다.
이운산은 딸이 사람들을 데리고 온 것을 보더니 허리를 빳빳이 세우며 이운해에게 삿대질했다.
“그래, 어디 한번 다시 말해봐!”
“아버지한테 약물 투여한 사람, 형이지?”
예전의 이운해였으면 아마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얼른 입을 닫고 구석 쪽으로 몸을 숨겼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이운해는 이운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추궁했다.
“약물은 무슨! 나는 어제 자정까지 삼촌들과 함께 포커 치고 있었어! 아버지는 어제 술을 많이 마셨으니까 당연히 동이 틀 때까지 푹 주무실 거라 생각해서 진선 씨한테 맡기고 나갔어!”
이운산은 당당한 말투와 달리 뭔가 찔리는 게 있는지 얼굴이 빨갛게 상기돼서는 좀처럼 이운해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아빠, 해명을 왜 해요? 여차하면 내 뒤에 있는 경호원들이 해결해 줄 텐데.”
이혜정의 말에 경호원들이 눈을 무섭게 뜨며 병실 안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최영훈이 붙여준 경호원들로 주천 공력이 5단인 엘리트들이었다.
이혜정은 이운산의 곁으로 다가가더니 나지막이 속삭였다.
“영훈 씨가 오늘 저녁에 같이 식사하재요. 그러니까 빨리 가요.”
“드디어 함께 식사하는 거야?”
양윤정이 눈을 반짝이며 딸을 바라보았다.
최영훈은 명문 가문의 후계자라 평소 티비나 기사로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런 사람과 드디어 함께 식사할 수 있게 됐으니 흥분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운산도 딸의 말을 듣고는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하지만 곧바로 표정 관리를 하며 이운해에게 말했다.
“우리는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 테니까 너희는 여기 남아서 아버지 잘 보살펴드려. 네 사위가 치료한 거잖아.”
그는 말을 마친 후 아내와 딸을 데리고 빠르게 병실을 나섰다.
‘어차피 아버지는 레이만 별장을 사느라 이제는 남은 자산이 별로 없을 거야. 그러니 지금 내가 신경 써야 할 건 아버지가 아니라 최씨 가문이야!’
병실 문이 닫힌 후 김태원은 진태하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까 선보인 그 침술, 혹시 태을 침술인가요?”
진태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김태원을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천원산 출신입니까?”
진태하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털썩!
김태원은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공수하며 인사를 올렸다.
“제자 김태원, 사숙공을 뵙습니다!”
김태원의 말에 사람들은 입을 떡 벌렸다.
‘이게 무슨 일이지? 왜 김 선생님이 태하한테 무릎을 꿇어?’
“혹시 황보이정 사형의 손제자이십니까?”
진태하가 시선을 내리며 물었다.
진강호는 진태하를 제자로 삼기 훨씬 전에 두 명의 제자를 더 거뒀었다. 말하자면 진태하의 사형들인 것이었다.
큰 사형인 황보이정은 20세기 초, 뛰어난 의술로 백성들을 치료하다 그 의술을 인정받아 어의로 궁궐까지 들어간 대단한 사람으로 6년 전에 향년 125세로 별세했다.
둘째 사형인 동방태진은 진강호의 두 번째 제자이지만 어떤 사람인지는 진태하도 잘 몰랐다. 들은 것이 거의 없었으니까.
진강호는 동방태진에 관한 얘기가 나오면 늘 한숨만 푹푹 쉬었다.
아주 오래전에 동방태진이 살았던 곳에 한 번 가본 적이 있었던 진태하지만 집 안에 널려있는 몸을 단련할 때 쓰는 물건들을 보며 그저 무예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만 알게 됐을 뿐 다른 건 여전히 아무것도 몰랐다.
“네, 황보이정 사공께서 저를 많이 예뻐하셨습니다.”
김태원은 반가움에 눈물까지 흘렸다.
“사공의 마지막 소원이 스승님과 사제의 얼굴을 한 번 더 보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일어나세요.”
진태하는 김태원을 일으켜 세운 후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6년 전에 스승님을 따라 큰 사형을 만나러 갔었습니다.”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그때 봤었네.’
6년 전, 진강호는 황보이정의 마지막을 감지하고 진태하와 함께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황보이정은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두 사람을 보게 되었고 마지막 소원까지 전부 다 이룬 후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고종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그제야 진태하의 의술이 이토록 대단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 황보이정 님의 사제였다니. 만약 이 젊은이를 우리 병원에 취직시키면 우리 병원은 전 세계적으로 큰 명성을 얻게 될 거야!’
고종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내 방에 좋은 차가 있는데 함께 대화라도 나누지 않겠습니까? 젊은이도 함께하지.”
김태원은 그 말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 원장이 좋은 차라고 하면 정말 좋은 차일 테지.”
하지만 진태하는 딱 잘라 거절했다.
“다음에 하시죠. 오늘은 따로 할 일이 있어서요.”
고종수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
모든 이가 존경하는 병원장과 의학계의 전설이라 불리는 김태원과 차를 함께 마시며 얘기를 나눌 기회인데도 진태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
다른 사람이 거절했으면 대놓고 한소리를 했겠지만 상대가 진태하라 고종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진태하는 말을 마친 후 병상 쪽으로 다가가 이석범의 맥을 짚어보았다.
이하음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있는 이석범을 바라보며 한영애에게 물었다.
“엄마는 어떻게 생각해요? 정말 큰아빠가 약물을 투여했다고 생각해요?”
한영애는 그 말에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다지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기 아버지한테 그런 약물을 투여할 사람은 아니야.”
“그럼 정말 최진선 씨라고?”
이운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진선 씨는 20년간 도우미로 일한 사람이에요. 얼마나 성실하고 착한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아버님한테 그런 약물을 투여했을 리가 없잖아요.”
“하긴... 그럼 이따 내가 삼촌들한테 물어볼게. 정말 포커를 친 게 맞는지. 그러면 이운산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게 밝혀질 거야.”
이운해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오늘 다시 봤어요. 평소의 당신이 아니던데요?”
한영애가 평소와 달리 부드러운 눈빛으로 이운해를 바라보았다.
한영애는 이운해가 이운산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을 때 상당히 놀라긴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통쾌하기도 했다.
이하음은 부모님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는 조용히 진태하 쪽으로 걸어갔다.
이하음이 다가왔을 때 진태하도 마침 이석범의 몸 상태를 다 확인하고 뒤로 돌았다. 두 눈이 딱 마주치게 되자 이하음은 얼굴을 핑크색으로 물들이며 먼저 말을 건넸다.
“할아버지 정말 완치된 거 맞아요?”
“네, 아마 문제없을 거예요. 만약 걱정되면 병원에 며칠 입원시켜서 경과를 지켜봐도 돼요.”
이하음은 진태하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태하 씨 덕분에 사신 거예요.”
진태하는 그 말에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말로만요?”
“밥 살게요. 뭐 먹고 싶어요? 뭐든지 말해요!”
이하음은 눈을 반짝이며 정말 뭐든 다 사줄 것처럼 굴었다.
그러자 진태하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더니 이하음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하음 씨가 먹고 싶다고 하면 그것도 줄 거예요?”
낯 뜨거운 말과 함께 전해진 그의 뜨거운 숨결에 이하음의 얼굴은 한순간에 빨갛게 달아올라 버렸다.
이하음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그때, 이운해가 곁으로 다가왔다.
“태하야, 아버지는 언제쯤 깨어나셔?”
“아마 내일이면 정신을 차릴 수 있으실 거예요.”
“그래? 음... 그러면 이대로 계속 병원에 입원시키는 게 나아, 아니면 집으로 데려가는 게 나아?”
이운해가 머쓱해하며 다시금 물었다.
“집으로 데려가시죠. 범인도 찾아야 하잖아요.”
이운산은 진태하가 이석범을 치료할 때 줄곧 초조한 얼굴이었다. 누가 봐도 뭔가를 들키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운해가 약물 투여 관련해서 추궁했을 때 이운산은 매우 열정적으로 해명했다. 얼굴이 빨개지기는 했지만 눈동자에 억울함이 서려 있었다.
즉, 그렇다는 건 이운산은 이석범이 빨리 죽기를 바라고 있었던 건 맞지만 직접 약물을 투여할 배짱은 없어 그 임무를 다른 사람에게 시켰다는 뜻이다.
최진선은 이운산이 콕 집어서 얘기한 도우미이기에 일단 최진선은 범인일 리가 없다.
진태하는 여기까지 생각하고는 갑자기 뭔가가 떠오른 듯 이운해를 바라보며 말했다.
“최진선이라는 도우미가 위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