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그 말이 떨어지자, 주변에서 지켜보던 학생들 사이로 웅성거림이 번져 갔다.
윤서아는 시선을 들어 권도현을 올려다보았다. 예상대로 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 직전, 상대를 억누르고 굴복시키려 할 때마다 드러나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서아야, 잘못했다면 벌받는 게 응당한 거야. 사과하고 싶은 거라면 그에 걸맞은 태도라는 게 있어야지 않겠어?”
역시 김하린을 위해서라면 그는 윤서아의 마지막 존엄마저 무참히 짓밟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과거의 그녀였다면 권도현의 분노가 두려워 정말로 무릎을 꿇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미 이혼한 마당에 내가 왜 이런 모욕까지 감수해야 하지?’
윤서아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린 씨, 저는 그 게시글의 작성자가 아니에요.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건 더 이상 당신들이랑 엮이고 싶지 않아서였어요. 하지만 계속 선을 넘으신다면...”
윤서아는 한 박자 쉬고 말을 이었다.
“그땐 저도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그 글의 진짜 작성자를 직접 찾아내는 수밖에 없겠죠. 아, 경찰은 무고한 시민을 잡아들이지 않으니까 지금 신고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말을 마치자 그녀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112를 누르려 했다.
그 순간, 김하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더니 반사적으로 권도현의 옷자락을 움켜쥐며 입술만 달싹였다.
윤서아는 그녀를 한 번 흘끗 보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단상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내가 참는다고 해서 만만하다는 건 아니지.’
그렇게 권도현의 곁을 지나치려는 순간, 그가 갑자기 윤서아의 손목을 확 붙잡았다.
힘이 실린 탓에 그녀의 손목이 금세 붉게 물들었다.
“이제 그만해. 이게 사과한다는 사람의 태도야? 그동안 네가 배운 교양은 다 어디로 간 거야?”
윤서아는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그러다 문득 과거 그와 함께 각종 파티에 참석하던 날들의 기억이 스쳤다.
그는 늘 말 한마디, 걸음걸이 하나까지도 그녀에게 완벽해야 한다고 요구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김하린 하나 때문에 그가 먼저 공개석상에서 이성을 잃고 있다.
윤서아는 가슴 깊숙이 차오르는 답답함을 눌러 삼키고 미소 지었다.
“도현 씨, 저희는 이미 이혼했어요. 제가 어떻게 살든 뭘 하든 당신과는 아무 상관 없다고요.”
권도현의 눈에 순간적인 당혹감이 스쳤다.
윤서아는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속이 다 시원해졌다.
그녀는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고 깔끔하게 자리를 떠났다.
‘개나 줘버릴 규칙! 개나 줘버릴 권씨 가문의 사모님 자리! 다신 안 돌아가!’
이 순간부터 윤서아는 자유였다.
그 누구도 더 이상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그녀는 학교를 벗어나며 오하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늘아, 우리 술 마신 지 너무 오래됐지? 나 방금 이혼했으니까 오늘 밤 죽을 때까지 마시자.”
오하늘의 행동력은 여전했다.
30분도 채 되지 않아 차를 몰고 나타난 그녀는 창문을 내리며 손을 흔들었다.
“잘했어! 눈도 마음도 멀어버린 개자식은 진작에 버렸어야지. 자, 언니가 오늘 제대로 즐기게 해줄게. 지옥 탈출 기념, 싱글 귀족 복귀 파티다!”
그들은 금세 대학로에서 멀지 않은 호스트바에 도착했다.
윤서아는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조명과 귀를 울리는 음악에 잠시 멍해졌다.
‘이런 곳에 온 게 대체 얼마 만이지?’
권도현과 결혼한 뒤로 이런 곳은 그녀의 삶에서 완전히 금지된 공간이었다.
“뭐 해, 멍 때리긴!”
오하늘이 그녀를 끌어당겨 자리에 앉히며 외쳤다.
“오늘 내 친구 기분 최고니까 제일 독한 술이랑, 잘생긴 애들 다 불러!”
형형색색의 술이 잔에 담겨 나왔고 각기 다른 분위기의 호스트들이 차례로 다가왔다.
윤서아는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이제 그녀는 누구의 소유도 아니니 누구의 규칙도 따를 필요가 없었다.
“너무 좋다...”
오하늘은 윤서아가 연거푸 술을 들이키는 모습을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서아야, 나 진짜 네가 오랜만에 이렇게 편해 보여서... 너무 행복해. 북극 가는 거 진짜 잘한 선택이야. 넌 원래 자유로워야 해.”
윤서아의 마음이 뭉클해져 눈가가 살짝 젖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오하늘의 잔과 세게 부딪쳤다.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자유를 위하여! 그리고 새출발을 위하여!”
술이 몇 바퀴 돌자 분위기는 더욱 달아올랐다.
곁에 있던 호스트가 술을 따르며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누나, 한 잔 더 드실래요?”
예전의 윤서아였다면 분명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살짝 취한 채 눈썹을 들어 올리며 보복에 가까운 방종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그래요, 여기 앉아요.”
호스트의 얼굴에 놀라움과 기쁨이 스쳤다.
그는 그녀의 곁으로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갔다.
윤서아는 그 모습을 보며 허무감과 자조가 밀려오는 걸 느꼈다.
‘그동안 나는 대체 뭘 하며 살았을까? 집착광 하나 붙들고 스스로를 갉아먹으며 도대체 뭘 얻은 거지?’
몇 시간 후, 윤서아와 오하늘은 호스트의 부축을 받아 밖으로 나왔다.
“누나, 저희가 데려다드릴게요.”
윤서아는 웃으며 그의 단단한 허리 근처로 손을 뻗으려 했다.
손끝이 따뜻한 체온에 닿으려는 순간, 귀 옆에서 들려오는 소름 끼치는 목소리에 그녀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윤서아! 너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