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부교수님이 훌륭하신 분이긴 하지만 한 번 이혼했잖아.”
성보람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언니는 남자친구도 제대로 사귀어본 적이 없어. 너무 손해 보는 것 같아.”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나의 모든 처음을 사랑하는 사람한테 주는 거라서 너무 행복해. 넌 사랑을 안 해봐서 몰라.”
성민서는 웃으면서 계속 말했다.
“게다가 도진 오빠도 일부러 재혼한 게 아니야.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어. 전처가 영주권을 받으려고 오빠의 학술 자료를 유출해버렸대. 그 후에는 귀국할 생각이 없다고 했고. 두 사람은 애초에 같이 갈 수 없었던 운명이었던 거야.”
그 말에 성보람은 깜짝 놀랐다. 한도진의 전처가 그런 여자였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럼 전처가 안 돌아왔다는 거야?”
“응.”
성민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성보람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재혼했는데 전처가 나타나서 난리라도 칠까 봐 걱정했었다.
두 자매는 오동나무가 늘어선 작은 길을 나란히 걸었다.
이곳은 대학원에서 선생님들에게 제공하는 아파트였다. 지어진 지 10년이 넘었지만 조용하고 아늑했으며 벽에는 담쟁이덩굴이 가득했다.
한도진의 집은 가장 안쪽에 위치한 저층 아파트였다.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성민서는 성보람의 안색을 슬쩍 살피며 나지막이 말했다.
“사실 언니가 너한테 얘기 안 한 게 있는데 오빠한테 다섯 살 된 딸이 있어. 그동안 할머니랑 같이 살다가 최근에 방학이라서 우리한테 왔거든. 애가 요즘 기분이 별로 안 좋으니까 뭐라 해도 그냥 가만히 있어.”
길을 걷던 성보람은 갑자기 다리가 후들거리고 정신이 아찔해졌다.
“부교수님한테 딸이 있다고? 그럼 언니가 새엄마가 된 거야?”
“목소리 낮춰.”
성민서가 귀를 만지면서 말했다.
“딸인데 엄청 귀엽게 생겼어.”
성보람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랑을 해본 적은 없지만 사랑은 너무나도 광적이고 비이성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성민서가 현관문을 열었다.
한도진이 소파에 앉아 귀여운 여자아이와 함께 동화책을 읽고 있었다.
편안한 잠옷 차림인데도 잘생긴 외모가 여전했고 눈매는 한 폭의 그림처럼 점잖고 우아했다.
하지만 성보람은 수업 시간에 그의 엄격하고 박학다식한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보람이 왔어?”
한도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정하게 말했다.
“밥은 먹었어? 뭐라도 해줄까?”
“괜찮아요, 부교수님. 저녁을 많이 먹었어요.”
성보람이 깍듯하게 대답했다.
한도진은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소개했다.
“내 딸 한아정이야.”
그러고는 딸에게 말했다.
“인사해야지. 민서 아줌마의 여동생이셔. 이모라고 불러.”
“하나도 안 닮았어요.”
한아정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 모습에 성보람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한아정이 한도진의 손을 뿌리쳤다.
“난 방에 가서 책이나 보겠어요.”
그러고는 씩씩거리면서 방으로 뛰어갔다.
“미안해. 애가 아직 어려서 철이 없어.”
한도진이 미간을 짚으며 달리 방법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요.”
성보람도 다섯 살짜리 아이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민서야, 보람이랑 얘기하고 있어. 가서 이부자리 좀 정리할게.”
한도진은 방으로 들어가 침대 시트를 깔고 집 안에 있던 깨끗한 수건과 칫솔을 꺼내왔다.
성보람이 성민서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언니, 아까 그 꼬마가 귀엽긴 한데 언니를 잘 따르거나 받아들일 것 같지는 않아.”
성민서가 웃으며 말했다.
“그거야 당연하지. 어린 나이에 부모님의 이혼을 겪으면 애는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어. 아정이한테는 내가 외부인이니까 당연히 경계하지. 네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도 그랬잖아. 그런데 봐봐, 지금 우리가 얼마나 사이좋게 지내.”
“내가 언제 그랬어? 난 그냥 언니가 날 싫어할까 봐 무서웠을 뿐이야. 그리고 애들이 다 나처럼 착한 건 아니라고.”
성보람은 그녀의 어머니가 잘 가르친 덕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친아버지는 술주정뱅이라 그녀에게 신경을 쓴 적도 없었다.
하지만 한아정은 달랐다. 한아정의 어머니는 영주권을 받기 위해 학술 자료까지 유출한 사람이니 인성이 엉망인 건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키운 아이가 그녀와 같을 수 있을까? 물론 아이를 너무 나쁘게 생각해서도 안 되었다.
하지만 30분 후 성보람은 생각을 바꾸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한아정이 그녀의 침대에 물을 쏟는 장면을 목격했다.
“뭐 하는 거야?”
성보람도 성격이 만만치 않았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한아정의 손을 잡았다.
“여긴 우리 집이에요. 내가 어디에 쏟든 무슨 상관이에요?”
한아정이 두 눈을 부릅떴다.
“난 아줌마가 싫어요. 성민서 그 여자처럼 우리 집을 차지하려는 거잖아요. 아줌마는 여기서 잘 자격이 없어요.”
성보람은 너무도 화가 난 나머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우리 언니가 너희 아빠랑 결혼했으니까 여기 있을 자격이 있어. 여긴 너희 아빠 집이기도 하지만 우리 언니 집이기도 해.”
“아니에요. 성민서는 뻔뻔한 불륜녀예요. 그 여자가 우리 아빠를 꼬시지만 않았어도 엄마 아빠가 이혼하지 않았을 거라고요.”
한아정이 원망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언니를 한 번만 더 욕했다간 가만 안 둬.”
성보람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아정이 눈을 부릅뜨고 성보람을 1초 동안 노려보더니 갑자기 입을 삐죽이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정아, 왜 그래?”
한도진과 성민서가 급히 달려왔다.
“아빠, 이모가 날 괴롭혀요.”
한아정은 곧바로 성보람의 팔을 뿌리치고 한도진의 품에 안겨 훌쩍거렸다.
“이모한테 물을 떠다 주려고 했는데... 실수로 이불에 쏟았어요. 그런데 이모가... 날 혼냈어요.”
성보람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직접 보지 않았다면 다섯 살짜리 아이가 새빨간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거짓말하지 마. 네가 일부러 쏟았잖아.”
한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보람아, 아정이 아직 어리니까 너무 뭐라 하지 마. 절대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닐 거야.”
한아정이 계속 울면서 말했다.
“그리고... 또 이 집은 아줌마 집이라고 했어요. 앞으로 아빠랑 아줌마가 아이를 많이 낳으면... 난 여기 있을 자격이 없대요. 아빠, 정말 날 버릴 거예요?”
“아니야. 아빠는 절대 우리 아정이 버리지 않아.”
한도진은 허리를 숙여 한아정의 얼굴에 묻은 눈물을 다정하게 닦아주었다.
성보람은 순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사실 그녀는 오늘 머물 곳이 없어서 온 것도 있지만 언니가 결혼 후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다.
그런데 결과는...
“보람아...”
성민서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까만 눈동자에 어쩔 수 없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언니,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
성보람이 화를 꾹 참으며 말하자 성민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 한아정이 갑자기 한도진의 품에서 몸부림치며 울음을 터뜨렸다.
“난 거짓말하지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저 이모가 날 괴롭혔단 말이에요. 내 손도 아프게 했어요.”
“아빠가 호 해줄 테니까 울지 마. 아빠가 책 읽어줄까?”
한도진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아정을 다정하게 달랬고 옆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는 누구도 탓하지 않았고 심한 말도 하지 않았다.
성보람은 그제야 오늘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니, 나 그냥 호텔에 묵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