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더 많은 컨텐츠를 읽으려면 웹픽 앱을 여세요.

제9화

그때 남자가 웃기 시작했다. “뒤에 저 차가 그쪽이 부른 차 같은데요.” “죄송해요.” 이보다 더 창피한 일이 있을까? 성보람은 허둥지둥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겨우 혼다에 올라탔는데 남자가 유리창을 두드리면서 젠틀한 목소리로 귀띔했다. “캐리어 가져가야죠.” 그러고는 뒷좌석 문을 열어 캐리어를 넣어주었다. 마지막으로 손까지 흔들면서 웃으며 말했다. “차 번호 기억해뒀으니까 도착하면 문자 보내요.” 성보람은 잠깐 멍해졌다가 이내 그의 뜻을 알아챘다. 밤에 낯선 차를 타고 가는 그녀가 걱정되어 일부러 기사 앞에서 저런 말을 한 것이었다. 그녀는 얼른 아는 사람인 척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얼른 들어가요.” 차가 출발한 후에도 성보람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세상에나. 어떻게 저렇게 잘생기고 다정한 남자가 있을 수 있지? 배선우랑은 정말 천지 차이야. 걔는 그냥 얄밉기만 한데.’ ... 하지만 그녀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마세라티가 배씨 본가로 들어간 건 알지 못했다. 마침 샤워를 마치고 나온 배선우는 노크 소리에 짜증을 내며 문으로 향했다. “또 무슨...” 그러다가 문 앞에 서 있는 친구를 보고는 하던 말을 멈췄다. “너 이 자식, 왜 연락도 없이 왔어?” 배선우가 육성진의 가슴팍을 툭 치자 육성진이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누구인 줄 알고 그렇게 짜증을 낸 거야?” 배선우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뒤돌아섰다. “들어와.” “들어가도 돼?” 육성진이 웃을 듯 말 듯 했다. “결혼했다면서? 형수님도 안에 계시는 건 아니겠지?” “꺼져.” 성보람 얘기가 나오자 배선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방으로 내쫓았어.” “너무한 거 아니야? 그래도 신혼인데.” 육성진은 방 안으로 들어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쯧쯧. 이건 유부남의 방이 아닌데? 너무 썰렁해.” “조만간 이혼할 거야.” 배선우는 수건을 집어 들고 젖은 머리를 닦았다. “그나저나 아직도 하지민을 잊지 못한 건 아니지?” 육성진은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한 사람은 국내외에서 인정받은 실력파 음악가에 외모까지 완벽한 여자고 다른 한 사람은 평범한 집안의 딸이라 차이가 크긴 하지. 남자라면 다 받아들이기 힘들 거야.” 배선우가 그를 힐끗거렸다. “지민이 요즘 너희한테 연락한 적 있어?” “없어.” 육성진이 고개를 저었다. “전에 너희 집에서 급하게 결혼 상대를 찾을 때 하씨 가문에도 부탁했다던데 거절당했다며? 지민이도 얼굴 한 번 안 비췄고. 쯧쯧. 과부가 될까 봐 그랬겠지. 난 걔가 널 엄청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배선우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됐어. 다 지나간 일이야. 사람은 원래 다 이기적이니까 거절하는 것도 당연해.” “언제부터 이렇게 이해심이 많았어?” 육성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혼하고 지민이랑 다시 잘해볼 생각인 건 아니지?” “닥쳐.” 젖은 수건이 육성진의 얼굴에 날아왔다. “하하, 농담이야. 그나저나 아까 너희 집으로 오는 길에 엄청 웃긴 일이 있었어.” 육성진이 화제를 돌렸다. “어떤 여자애가 날 콜택시 기사로 착각했지, 뭐야. 그런데 엄청 청순하고 귀엽게 생겼더라. 늦은 밤에 짐까지 들고 있는 걸 보니까 근처 부잣집에서 쫓겨난 것 같더라고. 어찌나 불쌍하던지.” 청순하고 귀엽다는 소리에 배선우는 성보람의 얼굴이 바로 떠올랐다. ‘이가 어쩜 그렇게 날카로워? 팔이 아직도 아파. 젠장!’ 육성진은 여전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만약 우리 집에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여자가 있었다면 절대 밤에 쫓아내지 않았어. 너무 안쓰럽잖아.” “안쓰러우면 지금이라도 쫓아가 보든가.” 배선우가 싸늘하게 말했다. “괜찮아. 그 여자애가 타고 간 콜택시 번호판을 기억해뒀거든. 무슨 일 생길 일은 없을 거야.” 육성진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 배선우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혀버렸다. ‘나처럼 매정하고 차가운 사람이 어쩌다가 성진이 같은 사람이랑 친구가 됐지?’ ... 저녁 8시. 성보람이 탄 차가 대학원 근처 아파트 단지 입구에 도착했다. 성민서가 베이지색 스웨터를 입고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몸매가 너무 말라 연약한 꽃송이처럼 가냘파 보였다. 성보람과 달리 성민서는 요염한 외모를 지녔지만 성격은 차분했다. “배선우가 널 내쫓았는데 그 집 사람들이 다 모른 척했단 말이야?” 성민서는 투덜거리면서 동생이 들고 있는 캐리어를 받아 들었다. “전에는 결혼해달라고 그렇게 부탁하더니 사람이 깨어나자마자 헌신짝처럼 버려? 이건 이용하고 버리는 거나 다름없잖아.” “그 집 사람들은 내가 나온 걸 몰라. 됐어. 진정해. 난 아무렇지도 않아. 배선우가 이러면 나야 더 좋지. 더 빨리 이혼할 수 있으니까.” 성보람은 조금도 불쾌해하지 않았다. 2주 만에 성민서를 만난 터라 장난스럽게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얼굴 좋아졌네? 생기가 돌아, 아주.” 성민서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눈을 부릅떴다. “싱겁긴.” 그녀는 잠깐 멈칫했다가 또 물었다. “아빠는 아직도 화 안 풀렸어?” 성보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가 부교수님이랑 몰래 결혼한 바람에 아저씨 요즘 기분이 매우 안 좋아.”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성민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빠는 날 배씨 가문에 시집보내서 예물이나 뜯어낼 생각밖에 없어. 돈에 제대로 눈이 멀었어. 솔직히 난 돈은 그냥 먹고살 만큼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거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평범하게 사는 게 내 소원이야.” 성범철이 어떤 사람인지 성보람은 잘 알고 있었다. 성범철은 딸 성민서가 배선우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그러면 사위 덕을 톡톡히 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버렸고 이젠 배선우에게 딸을 바꿔치기한 사실이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는 상황이 되었다. 아마 지금쯤 성민서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언니가 배선우랑 결혼하지 않은 건 하나의 문제고 부교수님이랑 몰래 혼인신고 한 건 또 다른 문제야.” 성보람이 달리 방법이 없다는 듯 말했다. “아저씨뿐만 아니라 언니 친엄마도 엄청 화났을걸?” “엄마는 날 낳지 말았어야 했다고 하셨어.” 성민서는 풀이 죽었다가 이내 웃음을 되찾았다. “하지만 도진 오빠는 너무나 훌륭한 사람이라 부모님도 곧 받아들이실 거야.” 성보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도진은 그녀의 대학원에서 가장 젊은 부교수였다. 한도진도 과거에는 신화와도 같은 존재였다. 최우수 교환학생으로 하드 대학교에 갔고 해외에서 복수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가 쓴 논문 중 몇 편은 국제 학술지에도 실렸고 재학 중에는 팀을 이끌고 프로그래밍 대회에 참가하여 아시아 지역 우승을 따내기도 했다. 사람들은 하나 같이 그를 우러러봤고 또 존경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는 금자탑 꼭대기에 있는 신화와 같은 사람이었다. 성보람도 그를 존경하긴 했지만 그 신화가 형부가 되니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 Webfic, 판권 소유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