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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배선우는 성씨 가문 집에서 무려 한 시간 반을 기다렸다. 에어컨도 켜지 않은 집안은 시간이 흐를수록 냉골처럼 썰렁해졌고 배선우의 인내심도 함께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성범철은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 딸을 다그쳤지만 전화를 받을 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오는 중이다, 차가 막힌다. 그 말뿐이었다. 배선우의 굳은 얼굴을 지켜보던 성범철은 속으로 성보람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성보람이 집에 들어왔다. “누가 너한테 이렇게 늦게 오라고 했어!” 성범철이 벌컥 소리를 질렀다. “선우 씨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데! 아침부터 일까지 제쳐두고 널 찾으러 온 거야. 넌 뭐? 꾸물대기나 하고 몇 살인데 아직도 가출이냐? 선우 씨가 얼마나 신경 쓴 줄 알아? 당장 와서 사과해.” 배선우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냉랭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미 물을 네 잔이나 마셨고 허리는 욱신거렸으며 속엔 화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체면과 예의만 아니었으면 성범철보다 먼저 폭발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성보람은 성범철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대신 곧장 배선우를 바라봤고 하얗고 단정한 얼굴에 억울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선우 씨, 어젯밤에 나보고 꺼지라고 한 사람, 선우 씨잖아요.” 맑은 목소리가 조용히 흘렀다. “나야 감히 안 나가면 더 뭐라 하실까 봐 나간 건데요.” 배선우는 순간 민망해졌다. 아무래도 성보람 부모님 앞에서 들을 얘긴 아니었다. 하지만 성범철 얼굴을 보는 순간, 딸을 위해 한마디 나설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그걸 확인하자 마음이 오히려 정리됐다. “난 방에서 나가라 했지, 배씨 가문에서 나가란 소린 안 했어.” 배선우가 싸늘하게 말했다. “지금 당장 짐 싸. 같이 돌아가.” “싫은데요.” 성보람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보고 나가라면 나가고 돌아가라면 돌아가고... 그럼 내가 너무 없어 보이잖아요.” 배선우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때, 성범철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네가 뭔 체면이 필요해? 선우 씨가 어떤 분인데 직접 널 데리러 온 것만 해도 네 체면 충분히 살려준 거야. 빨리 돌아가. 괜히 질질 끌지 말고.” 성보람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맞은편 소파에 털썩 앉았다. “안 가요. 밖에서 사는 게 훨씬 편하네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사람 눈치도 안 봐도 되고 누가 꺼지라 해도 안 꺼져도 되고 민망할 일도 없고요.” 배선우의 눈이 가늘어졌고 인내심도 바닥에 닿았다. “성보람, 마지막 기회야. 당장 따라와.” “선우 씨, 화내지 마세요. 제가 바로 설득하겠습니다.” 성범철이 다급히 나서더니 성보람을 붙잡아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또 억지 부리면 네가 성씨 가문 친딸 아니라는 거 폭로해버릴 거야.” 성범철의 혀끝이 독처럼 차가웠다. 성보람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피곤한 얼굴로 쏘아붙였다. “그딴 걸로 협박하지 마세요.” 성범철은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경고했다. “네 엄마는 지금 나랑 살고 있고 날 떠날 수도 없어. 널 못 막아도 네 엄마는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어.” “그런 짓 하면 가만 안 둘 거예요.”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 살기가 스쳤다. “그러니까 말 잘 들어. 나는 말하면 반드시 지켜.” 성범철의 눈에 악의가 가득했다. 성보람은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갈게요.”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녀는 마지막으로 돌아보며 말했다. “그 일로 협박만 하세요. 만약 진짜로 우리 엄마한테 손대면...” 예쁜 입꼬리가 싸늘하게 비틀렸다. “난 엄마 빼고는 세상에 미련 없는 사람인 거, 잘 아시죠?” 그 말을 끝으로 성보람은 방을 나섰다. 성범철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방금 그 눈빛, 마치 야수에게 찍힌 느낌이었다. 괜히 옛날에 방희진이 성보람을 무술시키겠다고 했을 때 동의한 것이 후회됐다. 이미 준비를 다 끝낸 표정이었다. ... 거실. 성보람은 고개를 들어 배선우를 향해 말했다. “가요. 같이 갈게요.” 배선우는 그녀 뒤에 선 성범철을 흘끗 봤다. 둘이 방 안에서 어떤 대화를 나눴는진 알 수 없지만 이렇게 순순히 돌아가겠다니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는 비웃듯 말했다. “아까는 꽤 딱딱하게 굴더니.” “굳이 그렇게 딱딱하게 굴 필요가 있나요.” 성보람은 둘만 들릴 정도로 낮게 말했다. “제가 뭐, 남자도 아닌데.” 배선우는 그 자리에서 거의 뿜을 뻔했다. 성보람의 아까 그 눈빛은 누가 봐도 베테랑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젠장.’ “아빠, 저 갈게요.” 성보람은 캐리어를 들고 먼저 집을 나섰다. 배선우도 길게 다리를 뻗으며 그녀를 따라나섰다. ...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배선우는 룸미러로 조용히 그녀를 봤다. 뭘 생각하는지 고개를 숙인 채, 검은 머리칼이 어깨에 흘러내렸고 우윳빛 턱선만 드러나 있었다. 멀리서 보면 딱 열여덟, 꽃처럼 예쁘고 순해 보였다. 하지만 방금 그 말투가 떠오르자 배선우는 괜히 넥타이를 조이고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요즘 애들은 성숙하다더니, 고등학교 때도 다 겪는다던데 대학생쯤이야 뭐.’ “성보람, 어젯밤 어디 있었어.” 배선우가 냉랭하게 물었다. “설마 밖에서 남자 만나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성보람은 비웃듯 고개를 들었다. “걱정 마요. 제가 선우 씨 싫어하긴 해도 저도 지킬 건 지켜요. 바람 같은 거 안 펴요.” “너처럼 막 나가는 여자, 누가 알아.” 배선우는 비아냥거렸다. “내가 언제 막 나갔는데요?” 성보람은 어이없어 입을 벌렸다. “그럼 어젯밤 어디 있었던 건데.” “제가 어딜 가든 보고해야 해요?” 성보람은 완전히 가시를 세웠다. “마음에 안 들면 이혼하면 되잖아요. 맘에 안 들면 계속 나가라 해요. 굳이 데리러 오지 말고요.” 배선우는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죽어도 물 안 드는 이 여자에 머리가 아파 이마를 짚었다. “내가 원해서 데리러 온 줄 알아? 우리 아버지가 시켜서 어쩔 수 없던 거야.” 성보람은 피식 웃었다. “밖에선 선우 씨가 무슨 재계 천재, 신화, 대단한 인물이라던데? 근데 겨우 아버지 말 한마디에 휘둘려요? 보기보다 허세였네요.” 배선우는 그 말에 거의 피를 토할 뻔했다. 짜증 나서 핸들을 꽉 쥐고 몇 번이고 심호흡을 했다. “성보람, 나도 널 안 좋아해. 하지만 네가 혹시 바람이라도 피면 너희 집안 통째로 끝나는 거 알아둬.” 성보람은 어이없게 웃었다. “나는 선우 씨보다 대인배예요. 당신이 바람 펴도 난 신경 안 써요.” “...” 배선우는 정말 더는 이 여자를 보고 싶지 않았고 발끝에 힘을 주어 엑셀을 밟았다. 성씨 가문 본가에 도착하자마자 다그쳤다. “내려. 나 회사 가야 해.” 성보람도 더 보고 싶지 않았기에 캐리어를 들고 냉큼 내렸다. “잠깐.” 배선우가 고개를 돌렸다. 한 손은 운전대에 얹힌 채,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 협상한 거 기억하지? 빨리 우리 부모님이 널 싫어하게 만들어.” “협상이라...” 성보람은 방긋 웃었다. “그러려면 협조 좀 해주세요. 좀 더 공손하게 저한테 잘해줘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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