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배선우의 눈빛이 가늘고 날카롭게 좁혀졌다.
아마도 이렇게 당당하게 자신에게 맞서는 사람을 보는 게 정말 오랜만인 듯했다.
게다가 이 여자, 어젯밤 자신이 한 말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고스란히 되돌려주고 있었다.
받은 건 반드시 되갚아주는 성격, 그런 부류였다.
하지만 성보람은 여전히 태연했다.
“혹시 화 나셨어요?”
“성보람, 죽고 싶으면 차라리 똑바로 말해. 그딴 식으로 돌려 말할 필요 없어.”
배선우가 날 선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성보람은 겁먹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살짝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그냥 어젯밤 제 마음이 어땠는지 알려드리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그녀는 담담하게 말하며 부드럽게 덧붙였다.
“우리 협력 관계잖아요. 서로 평등한 사이인데 선우 씨는 늘 우월한 척하잖아요. 가끔은 꺼지라는 말도 아무렇지 않게 하고요. 사회적 지위야 선우 씨가 훨씬 높겠지만 이 결혼 안에서만큼은 서로가 서로에게 발목이 묶여 있는 거 아닌가요?”
배선우의 눈동자에 억눌린 감정이 스치듯 지나갔다. 곧 그 표정엔 생각에 잠긴 듯한 기색이 떠올랐다.
성보람 같은 여자는 처음이었다.
대부분의 여자는 자신 앞에선 공손하고 조심스러웠으며 괜히 심기를 거스를까 눈치만 봤다.
하지만 이 여자만은 애초부터 평등을 요구했다.
그 낯선 감각이 오히려 배선우를 자극했고 묘하게 점점 그녀가 궁금해졌다.
“스스로 잘 생각해 봐요.”
성보람은 그 말만 남기고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고고한 뒷모습과 분홍색 캐리어를 바라보며 배선우는 얼굴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그 말은 평소 자기가 부하 직원들한테 하던 말 아닌가.
...
성보람은 배씨 본가에 도착했다.
오전 열 시.
집안의 성인 남자들은 모두 출근한 뒤였다.
하지만 배선우의 부모와 조민주는 집에 머물고 있었다.
“아버님, 어머님, 형님.”
성보람은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어머, 그래도 집에는 돌아왔네.”
조민주는 입꼬리를 비뚤게 올리며 말했다.
“배씨 집안에 들어온 첫날 밤에 가출이라니. 난 또 우리 집안이 싫어서 돌아올 생각도 없는 줄 알았네요.”
“형님, 오해세요.”
성보람의 표정이 굳으며 까맣고 큰 눈망울이 억울하게 흔들렸다.
“제가 먼저 나가고 싶었던 게 아니에요. 선우 씨가 꺼지라고 해서... 상처받아서 그랬던 거예요.”
“뭐라고? 그 놈이 감히 네게 꺼지라고 했다고?”
배정헌이 당장이라도 일어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분노했다.
김미경은 막내아들을 두둔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선우가 처음엔 보람이랑 친하지 않았잖아요. 성격이 좀 급해서 그런 거지. 보람인...”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곧 성보람을 차갑게 노려봤다.
“너도 참 나약하다. 선우가 나가라면 그냥 나가? 그렇게 순종적이면 선우가 죽으라고 해도 가겠니?”
성보람은 일부러 잠시 고민하는 척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빠가 어릴 적부터 그러셨어요. 시집가면 남편 말 잘 듣는 게 도리라고요.”
“...대체 지금이 어느 땐데 그런 소릴 해!”
배정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꾸짖었다.
“앞으로 선우 말은 흘려듣고 진짜 괴롭히면 나한테 와라. 내가 그 놈, 아주 제대로 혼쭐 내줄 테니.”
“감사합니다, 아버님.”
성보람은 입으로는 감사 인사를 전했지만 속으로는 복잡했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자신에게 호의를 갖는 사람은 배정헌뿐이었다. 하지만 이혼하려면 그조차 자신을 싫어하게 만들어야 한다.
‘하아...’
“사모님 짐 2층에 올려다드려.”
배정헌이 명령하자 가정부가 성보람의 짐을 들고 2층으로 향했다. 하지만 주침실 앞에 이르렀을 때, 성보람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2층에 손님방 있나요? 제 짐은 거기로 부탁드릴게요.”
가정부는 난감해하며 되물었다.
“사모님, 혹시... 둘째 도련님과 따로 주무시려는 건가요?”
성보람이 뭐라 답하려던 순간, 뒤에서 배정헌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신혼부부가 무슨 방을 따로 써. 그냥 들어가서 자. 아, 거기 소파도 있던데 그것도 빼.”
성보람은 어이가 없었다.
‘...정말 철저하네. 소파에서 잘 권리조차 박탈해버리다니.’
“아버님...”
그녀는 힘겹게 얼굴을 찡그리며 돌아봤다.
“저랑 선우 씨, 아직 서로 잘 몰라서 같은 방은 조금... 선우 씨도 불편해 할 거예요. 저도...”
“낮에는 일하고 밤에도 따로 자면 더 친해질 리 없지.”
배정헌은 코웃음을 치며 잘라 말했다.
“나랑 네 어머니는 맞선 보고 결혼해서 결혼 전엔 딱 한 번밖에 안 봤다. 그래도 자다 보니까 친해지더라.”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성보람이 반박할 틈도 없이 결론 내렸다.
“그냥 그렇게 해. 선우는 내가 알아서 설득할 테니.”
‘같은 방이라...’
성보람의 온몸 세포가 일제히 반발했다.
겨우겨우 용기 내어 주침실에 들어갔지만 짐은 꺼내지도 않았다. 또 나가라고 하면 곧바로 나가면 되니까.
...
배경그룹.
소운시 최대 기업이자 글로벌 탑 기업 반열에 오른 대기업.
하지만 내부 사정을 아는 사람만 안다.
불과 5, 6년 전까지만 해도 배경그룹은 직원 수 백 명 남짓한 중소기업이었다.
배선우가 경영권을 쥔 후, 과감하고 냉혹한 개혁으로 폭풍 성장해 지금의 배경그룹이 된 것이다.
얼마 전 배선우의 교통사고 소식으로 회사는 흔들렸고 오늘 그의 복귀를 맞이해 내부에선 성대한 환영식을 준비했다.
하지만 모습을 드러낸 배선우에게 직원들이 꽃다발을 건넬 새도 없이 그는 그것을 쓰레기통에 내던졌다.
그는 날카롭게 사람들을 훑어보며 차갑게 말했다.
“주가가 한 달째 연속 하락인데 이런 짓 할 때인가요?”
...
직원들은 하나같이 놀라며 움츠러들었다.
‘대표님... 오늘 기분 안 좋은가 보다.’
“임원들 불러요. 회의합시다.”
배선우는 단호하게 말하며 모델처럼 긴 다리를 뻗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는 점심도 거른 채, 꼬박 3시간 동안 회의를 이어갔다.
사무실로 돌아오자 양대은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대표님, 하지민 씨 오셨습니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배선우는 걸음을 멈추더니 곧 이마가 깊게 찌푸려졌다.
팔로 문을 밀어 열자 창가에 서 있던 하지민이 돌아섰다.
그녀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선우야... 이렇게 다시 볼 줄 몰랐어.”
말을 마친 그녀가 그의 품에 안기려 했다.
그러나 배선우는 몸을 옆으로 비껴 피했다.
허공을 껴안은 하지민은 이내 눈물을 터뜨렸다.
“선우야, 혹시 나 미워하는 거야? 나도 이제야 알았어. 네가 날 공항에 데려다준 그날 밤, 사고가 났다는 걸... 부모님이 계속 숨기셨어.”
하지민은 울먹이며 쉼 없이 말을 이었다.
“너도 알잖아. 그때 나 해외 투어 중이라 얼마나 바빴는지. 전화해도 연락 안 되고 혹시라도 네가 날 버릴까 봐 무섭고 매일매일 걱정했어... 사실 난 온 팀을 데리고라도 너한테 가고 싶었어. 하지만 난 팀의 핵심이라 떠날 수 없었어...”
“어제야 겨우 귀국했어. 부모님 말로는 배씨 가문에서 우리 집에 혼사를 추진하려 했다고... 우리 부모님은 네가 오래 못 산다 생각하고 내 의사도 묻지 않고 바로 거절했대.”
하지민은 말할수록 슬픔에 잠기며 울음을 터뜨렸다.
배선우의 굳어진 얼굴에도 천천히 부드러운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