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채찍 서른 대
“아버지, 가법을 시행해 주세요!”
안지연의 목소리가 사당에 울렸다. 안국공이 막 명을 내리려는 순간, 김서준이 나섰다.
“잠깐.”
그러자 순식간에 고요가 내려앉았고, 모두의 시선이 김서준에게로 쏠렸다.
“혼례가 임박하니 피를 보게 하여서는 아니 된다.”
김서준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깟 장신구 몇 벌일 뿐이다. 안국공부의 여인들에게 내가 미리 보낸 축하 예물로 삼겠다.”
안국공이 곧바로 뜻을 헤아리고 물러섰다.
“전하의 은혜가 크십니다. 너희들은 어서 인사드려라.”
안소민은 기계처럼 머리를 조아려 차디찬 돌바닥에 이마를 댔다.
“전하의 은덕에 감사드립니다.”
“안 됩니다!”
안지연은 물러서지 않았다.
“가법은 폐할 수는 없습니다. 본보기로 채찍 서른 대는 쳐야 합니다!”
김서준의 눈빛에 잠깐 난색이 스쳤다.
“그렇다면 네 말대로 하라.”
말을 마친 김서준은 곁으로 물러나 더는 손을 대지 않았다.
거친 채찍이 허공을 가르며 내려앉았다.
첫 번째 채찍에 등이 화끈 타들었으나, 안소민은 이를 악물고 소리를 삼켰다.
두 번째 채찍이 어깨를 후려치자 옷자락이 갈라졌고, 안소민은 소매 끝을 움켜쥔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것도 모른 채 버텼다.
“다섯, 여섯, 일곱...”
채찍이 이어질수록 안소민의 살과 피가 뒤섞였고, 선혈이 척추를 타고 흘러 바닥에 고였다.
통증이 무감해질 즈음, 안소민은 온몸이 얼음장처럼 식어가는 걸 느꼈다. 힘겹게 눈을 뜨니 김서준이 안지연의 두 눈을 가리고 있었다.
“보지 마라.”
김서준의 목소리는 다정했으나 가시에 박힌 듯 서늘했다.
“악몽이라도 꾸겠다.”
마지막 채찍이 떨어지자, 안소민은 마침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안소민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등의 상처는 겨우 붕대로 동여매 있었다.
침상 머리맡에는 소란의 빌미가 된 장신구 상자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그 곁에는 새 상자 몇 개가 더 있었다.
“아가씨, 저하의 분부로 따로 들여보낸 물건입니다.”
한 상궁이 조심스레 말했다.
“좋은 상처약도 넉넉히 들었사옵니다.”
안소민이 반짝이는 보석들을 바라보다 쉰 소리로 내뱉었다.
“받지 않겠다. 도로 가져가라.”
한 상궁이 잠시 망설이다 좌우를 물리고 낮게 덧붙였다.
“저하께서 아가씨의 원통함을 아시고 어의를 청하셨사옵니다. 오늘 밤 동궁으로 오시어 진맥을 받으라 하시옵니다.”
“필요 없다.”
안소민이 고개를 저었다.
“움직이기도 어려우니 가지 않을 거다. 이리 귀한 물건도 서녀인 내가 감당할 바도 아니다.”
더 이상 안소민을 설득하지 못하겠음을 알아차린 한 상궁은 깊이 한숨을 쉬고 물건을 거두어 나갔다.
그 뒤로 며칠, 안소민은 방에서 상처를 회복했다.
밤이 깊으면 비밀 통로 어딘가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들려왔다. 김서준이 기다린다는 것을 알았으나, 안소민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모르는 체했다.
박서희가 병이 위중하다는 말을 듣고서야, 안소민은 몸을 일으켜 성 밖의 절에 가서 기도를 올렸다.
기도를 올리고 돌아서던 길, 인연 나무 아래에서 편한 복장 차림의 김서준과 안지연을 마주쳤다.
“두 분의 인연은 하늘이 맺어 주었으니, 반드시 백년해로하실 것입니다.”
대사님이 웃으며 붉은 끈을 내밀었다.
안지연이 수줍게 김서준의 어깨에 기대자 김서준은 다정하게 붉은 끈을 손목에 매어 주었다.
안소민은 말없이 돌아서려 했다. 그러나 층계에 이르자 손목이 불쑥 붙들렸다.
고개를 들자, 김서준의 깊은 눈동자가 마주했다.
“요 며칠 어찌하여 동궁에 오지 않았느냐.”
불쾌함이 가득 배인 낮은 목소리가 내려왔다.
“내게 노하여 그러는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