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민설아 씨, 한번만 더 생각해 보시겠어요?”
가정법원 창구 직원이 안경을 끌어 올리며 물었다.
“하 대령님은 우리 군부대에서 앞날이 가장 밝은 분인데...”
“괜찮아요.”
민설아가 직원의 말을 끊으며, 놀라울 만큼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마음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민설아의 손끝이 무의식적으로 혼인증명서에 박힌 사진을 쓸어내렸다.
사진 속 하선우는 군복을 입고 있고, 민설아는 붉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두 사람의 웃음은 누구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혼인신고를 하던 날, 하선우는 민설아를 안아 들고 귀가에 대고 또박또박 말했다.
“설아야, 나는 평생 너 하나만 바라볼 거야.”
첫날밤, 민설아가 긴장해서 눈물을 흘리자 하선우는 눈물을 하나하나 입맞춤으로 닦아 주며 말했다.
“평생 잘해 줄게. 나만 믿어.”
하지만 지금 그 모든 맹세는 침대 위에서 강서진과 뒤엉켜 있던 장면으로, 지진이 났을 때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강서진부터 구해냈던 하선우의 뒷모습으로 바뀌어 버렸다.
“알겠습니다. 절차상 한 달 정도 지나면 이혼이 확정됩니다.”
직원은 한숨을 내쉬며 접수 서류를 건네주었다.
서류를 받아 들고 가정법원을 나온 민설아는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곧장 임업청으로 향했다.
“청장님, 산림 지대에 가서 숲을 지키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저도 지원하겠습니다.”
임업청장 장영수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민설아 씨, 요즘 나라에서 산림 보호를 장려하긴 하지만 산림 보호원 일은 매우 힘들어요. 한 번 가면 몇 년씩 못 돌아오는 자리인데...”
장영수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말을 덧붙였다.
“게다가 민설아 씨는 하 대령님과 그렇게 사이가 좋다면서요. 하 대령님께서 민설아 씨를 보내 주겠어요?”
“하선우의 동의는 필요 없습니다.”
민설아가 이혼 접수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하선우와는 이미 이혼했습니다.”
장영수는 할 말을 잃었다.
군인 아파트에서 하선우와 민설아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금슬 좋은 부부였다.
누군가가 이혼한다고 해도 절대 하선우와 민설아는 아닐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부부 사이 일은 남이 함부로 끼어들 수 없는 법이었다.
장영수는 더 묻지 않고 서랍에서 지원서를 꺼내 민설아의 앞에 놓으면서 말했다.
“좋아요. 그럼 제가 지원서를 제출해 보죠. 언제쯤 출발은 할 생각인가요?”
“이혼이 확정되는 날, 바로 떠나겠습니다.”
민설아가 임업청 밖으로 나왔을 때는 석양이 완전히 기울어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던 민설아의 손목을 누군가 확 잡아챘다.
“설아야!”
바로 앞에 서 있던 하선우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두 눈에는 핏줄이 가득했다.
하선우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상처도 아직 다 안 나았는데 어디를 이렇게 혼자 돌아다니는 거야? 오늘 내가 하루 종일 널 찾아다녔잖아. 알기나 해?”
민설아는 하선우의 다급한 표정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부터 허탈한 웃음이 치밀어 올랐다.
하선우는 그렇게 민설아를 찾았으면서 정작 진짜 위험할 때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사람이었다.
민설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하선우는 그 침묵을 삐침으로 받아들였고 이내 자세를 낮췄다.
“알았어, 알았어. 다 내 잘못이야. 더는 화내지 마. 응? 군인 아파트는 아직 수리 중이니까 우선 군부대 숙소에서 같이 지내자.”
민설아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여기서 이혼 얘기와 산림 지대에 가겠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하선우는 절대 보내 주지 않을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민설아는 짧게 대답했다.
“그래.”
그 한마디를 남기고 민설아는 하선우의 지프차에 올랐다.
차는 곧 부대 숙소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민설아는 온몸이 천근만근처럼 피곤했다. 겨우 현관까지 올라와 문을 열려는 순간, 발걸음이 굳어 버렸다.
거실 소파에 강서진이 앉아 있었다.
민설아를 보자마자 강서진은 벌떡 일어나 비틀거리듯 달려왔다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설아야!”
강서진은 서러움에 북받쳐 울음을 터뜨렸고 두 손으로 민설아의 옷자락을 꽉 잡은 채 매달렸다.
“지난번 일은... 아직 사과도 못 했어. 무슨 잘못이 있든 죄다 내 잘못이야. 부디 선우 씨를 원망하지 말아 줘.”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고 강서진은 제대로 말도 잇지 못했다.
“준성 씨가 떠난 뒤로... 난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면 다시 시집가기도 어렵고 아이도 없이 혼자 남으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겠어...”
강서진은 흐느끼며 애원했다.
“그러니까 설아야, 네가 허락해 주면... 아이만 하나 생기면 난 바로 떠날게. 너희 둘 사이에 껴서 방해하지 않을게요. 제발 내가 선우 씨의 아이를 하나만 가지게 해줘.”
하선우는 옆에서 그 초라한 모습으로 매달려 우는 강서진을 바라보았고 눈빛 어딘가에 연민이 스쳤다.
하선우는 서둘러 다가가 강서진을 부축해 일으키며 말했다.
“설아가 이미 허락했어요. 얼른 일어나요.”
강서진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번쩍 들었고 눈에는 아직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정말... 허락했어요?”
민설아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이 상황이 너무나도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요. 허락했어요.”
민설아는 나지막이 대답하며 입꼬리를 아주 조금 비틀어 올렸다.
그 웃음에는 씁쓸함과 비웃음이 뒤섞여 있었다.
‘하선우가 너한테 아이 하나 주는 것만 허락한 게 아니야. 하선우란 남자까지 덤으로 통째로 넘겨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