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전민지는 눈물을 훔치며 스스로를 비웃듯 말했다.
“계층 상승이 그렇게 쉬울 거라고 생각해? 나 이미 26살이야. 내 모든 청춘을 기훈 씨와 함께했어. 기훈 씨는 내가 지금 만날 수 있는 최고의 결혼 상대야. 그런데 헤어지면, 내가 어디에서 그런 조건의 남자를 또 만날 수 있겠어?”
나는 살짝 한숨을 쉬며 조심스레 되물었다.
“그런데 네 뱃속의 아이에게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데, 너는 도대체 무엇을 바라는 거야?”
“한 번 더 시도해 보고 싶어, 혹시... 기훈 씨가 마음을 바꿀지도 모르잖아?”
전민지는 목소리에 간절함을 실어 나에게 물었다.
“부탁인데, 이 일만은 비밀로 해줄 수 있어? 회사에 알려지면 안 돼... 우리 부서에 내 자리를 빼앗으려는 사람들이 여럿이야. 임신한 사실이 탄로 나면 순식간에 나는 그 자리에서 밀려날 거야.”
그녀가 이렇게 무기력하고 여린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그렇게까지 사정하는데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알겠어, 약속할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네가 맡긴 그 산더미 같은 영어 문서는...”
아침에 그녀가 나를 힘들게 했던 일이 떠오르자 그녀 역시 미안함을 느꼈는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사과했다.
나는 그녀가 수액을 다 맞을 때까지 함께 있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준 뒤에야 비로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떠나려는 순간 그녀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세영아, 사실 너 괜찮은 사람이야.”
‘사랑이 그렇게 강한 여자를 이렇게까지 만들 수 있다니.’
내가 예전에 대학원 추천 입학을 포기했을 때 전민지가 왜 그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다음 날 전민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회사에 나타났다.
업무를 처리하는 그녀는 여전히 날렵하고 신속했다.
오후가 되자 그녀는 나를 사무실로 불러 조용히 부탁했다.
“세영아, 나 좀 도와줄 수 있을까? 저녁에 우리 회사 전무님과 함께 참석해야 할 술자리가 있는데, 내가 임신해서... 술을 마실 수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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