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어서 가 보거라, 우 부인의 몸이 무엇보다 중하니라.”
세 사람이 함께 마차에 올랐다. 나는 심계민이 걸쳐 준 외투를 스스로 여미며 한쪽에 앉았다.
위유정은 바람을 막겠다 하여 두터운 옷을 입었기에 젖지는 않았으나 물에 빠진 탓인지 본래 희던 얼굴빛이 더욱 창백하였다.
숨결마저 거칠고 급하였다.
“유정아, 몸은 어떠하냐?”
위유정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형님께서 제 뒤에 건져 올려지셨으니 오라버니께서 살펴주셔야 해요.”
이는 곧 우혁수가 먼저 자신을 구했노라 자랑하려는 말이었다.
나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어디서든 틈만 나면 저리도 드러내고 싶어 하는구나. 오늘 이 일 또한 나로 하여금 서방님께서 먼저 자신을 건졌음을 똑똑히 보게 하려는 짓이겠지. 하나 무슨 꿍꿍이가 있든 이번 한 번은 눈감아 줘야지. 다시 건드린다면 그땐 봐주지 않을 것이야.’
우혁수가 나를 돌아보자 나는 태연히 대꾸했다.
“굳이 신경 쓰지 마세요. 전 괜찮습니다.”
우혁수의 눈길이 내 어깨에 걸친 외투로 향하더니 이내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자신의 아내가 다른 사내의 옷을 걸쳤으니, 마치 그를 없는 사람처럼 만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대는 괜찮을지 모르나 유정이는 본디 몸이 약하오. 대체 이 아이를 끌어 물에 같이 빠진 것은 무슨 심보란 말이오?”
나는 비웃음을 흘렸다.
“제가 끌어다 물에 같이 빠졌다고요? 제가 살려 달라 애걸하였습니까? 본디 저는 빠질 일이 없었으나 아가씨가 억지로 손을 뻗어 구한다 한 탓에 도리어 빠져든 것입니다. 되레 제가 묻고 싶군요. 아가씨는 대체 무슨 꿍꿍이로 그런 짓을 한 것입니까?”
위유정은 고개를 숙인 채 두 사람 눈에 띄지 않게 살기를 감추었다.
그러나 이내 얼굴을 들어 보일 때는 눈물이 그렁그렁해 억울한 표정뿐이었다.
“죄송해요, 형님. 당시에는 오직 구하려는 마음뿐이었어요. 제 힘이 모자라 이리되었으니... 다 제 탓입니다. 죄송해요...”
이를 본 우혁수는 소청옥이 도리어 무정하다 여겼다.
“유정아, 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다. 마땅히 사과해야 할 이는 저 자가 아니더냐.”
나는 냉소를 지었다.
‘눈멀고 귀 닫힌 이에게 무슨 해명을 더하리...’
“제가 분명히 말했었죠. 전 이미 서방님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서방님을 두고 누구와 다툴 마음도 없어요. 믿든 말든 그건 서방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일은 더 묻지 않겠어요. 하나 이후 서방님의 사촌 동생이 제 앞에 얼씬거리지 않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제 앞에 나타난다면 그때는 가만두지 않을 테니 말이죠. 서방님도 제 수단이 어떤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마부, 마차를 세워주시죠!”
나는 젖은 외투를 두른 채 마차에서 내렸다.
등을 돌리는 순간, 뒤에서 우혁수가 단호히 ‘가시오’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보다 더 마음이 차가워질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곧장 작은 오라버니가 몸담고 있는 한림서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온몸이 흠뻑 젖은 나를 본 작은 오라버니가 황급히 달려와 걱정스레 물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어서 가서 마른 옷을 마련하라!”
그를 보는 순간, 내 마음속에 억눌렀던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
“작은 오라버니...”
작은 오라버니는 내 모습을 보고는 눈빛 가득 연민을 띠더니 곧 분노하였다.
“우혁수가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청옥아, 염려 말거라. 이 작은 오라버니가 당장 그자를 불러내어 따져 물을 것이다. 이번만큼은 반드시 네 편을 들어 주리라!”
가장 아끼는 여동생을 그리 구박하다니, 이번에는 결코 가만두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듯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예요, 작은 오라버니. 그자가 절 괴롭힌 것은 아닙니다. 다만 유람 중 물에 빠진 것뿐이에요.”
누구보다 이 여동생에 대해 잘 아는 작은 오라버니는 당연히 믿지 못했다.
그를 빼고서야 누가 나를 이토록 풀이 죽게 만들 수 있겠는가?
그러자 내가 덧붙여 말했다.
“정녕 그자가 아닙니다. 이제 그자는 저를 서럽게 할 수조차 없어요. 전 이미 그자를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내가 유일하게 서러움을 느끼는 것은 전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끝내 우혁수가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영원히 지켜 주겠다 맹세했건만 결국 그는 나를 내버려 두었었다.
비록 그때의 나도 어리석기는 마찬가지였다.
작은 오라버니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그자를 더는 좋아하지 않는다니?”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마치 해가 서쪽에서 떠오른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눈치였다.
“정말이에요. 저는 이제 그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혼할 생각이에요.”
나는 온 얼굴 가득 진심을 담아 작은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
작은 오라버니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내 이마를 짚어 보았다.
나는 눈을 굴리며 그의 손을 치웠다.
“제정신 맞아요. 3년 동안 좋아하였으나 그토록 해도 끝내 제게 마음을 주지 않더군요. 그러니 이제서야 내려놓을 뿐입니다.”
이 말을 들은 작은 오라버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려놓았다 하니 잘되었구나, 잘되었어! 내가 진즉 말하지 않았더냐, 그 우혁수는 본디 좋은 사내가 아니니라. 우리 청옥이에게 전혀 합당한 인물이 아니지.”
“청옥아, 걱정 말거라. 설사 갈라지더라도, 설사 재가를 한다 하여도, 이 작은 오라버니와 큰 오라버니,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께서 다시 좋은 배필을 찾아줄 것이다. 이후로는 아무도 감히 너를 업신여기지 못하리라.”
이에 나는 싱긋 웃었다.
“작은 오라버니, 비록 두 번째 혼인이 되더라도 청옥이는 아직 몸가짐이 결백하니 두려울 것 없습니다.”
말을 마치며 소매를 걷어 팔목 안쪽의 수궁사를 드러냈다.
그 순간 작은 오라버니의 얼굴빛이 변하였다.
내가 그를 위로하려고 말을 잇기도 전에 수행원이 들어와 고했다.
“옷이 준비되었습니다.”
작은 오라버니는 깊이 숨을 고르며 내 젖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청옥아, 작은 오라버니가 잠시 볼일을 보아야 하니 옷 갈아입고 먼저 돌아가거라.”
나는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작은 오라버니. 그리하세요. 저는 곧 돌아가겠습니다.”
내가 떠나는 것을 보고서야 작은 오라버니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혼인한 지 삼 년이건만 수궁사가 변함없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 세월 동안 내가 얼마나 큰 모멸과 억울함을 견뎌야 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우혁수... 참으로 가관이로다.’
소봉남은 곧장 우혁수를 찾아가자마자 주먹을 날렸다.
우혁수가 반격하려 했으나 소봉남이 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혼인한 지 3년이건만 청옥이의 수궁사가 그대로라니... 우혁수, 네가 과연 사내란 말이냐! 어찌 우리 여동생을 이리 모욕케 하였느냐!”
그의 목소리는 분노로 인해 떨렸다.
“청옥이가 너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천한 신분의 네가 어찌 우리 집 귀한 보배와 혼인을 할 수 있었겠느냐! 오늘 이 한 대는 경고이니라. 다시 우리 여동생을 울게 만든다면 그때는 내 손으로 네 목숨을 끊어 버릴 것이다!”
말을 마친 그는 우혁수를 힘껏 밀쳐내고 자리를 떠났다.
이대로 더 머물렀다가는 되레 우혁수가 자신을 만신창이로 만들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우혁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눈동자에는 폭풍이 이는 듯하였다.
때가 아니었기에 자제했지만 그게 아니었다면 당장에서라도 소봉남의 목숨을 끊었을 터였다.
내가 우씨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우혁수는 집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곧장 내 뜰로 들어왔다.
젖은 옷으로 오래 걸은 탓인지 머리가 무겁고 그저 잠들고 싶을 뿐이었다.
깊이 잠든 사이, 몸 위로 무거운 기운이 내려앉았다. 눈을 뜨자 술 냄새를 풍기며 다가오는 우혁수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눈빛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나는 힘껏 밀어내며 소리쳤다.
“서방님! 정신 차리세요, 미치셨습니까?”
그러나 그는 술기운에 이성을 잃은 듯, 거친 손길로 나를 제압했다.
“그래, 나 미쳤소! 하나 이 모든 건 그대가 자초한 일이오. 합방을 원하지 않았소? 내가 그 소원 이뤄주리다.”
그의 말은 흉포했고 눈빛은 제어할 수 없는 짐승과 같았다.
나는 아픔에 비명을 질렀다.
“아아!”
그는 나의 손목을 거칠게 붙잡고 사정없이 덮쳐왔다.
저항했으나 온몸은 힘이 빠져나가고 숨은 막혀 왔다.
거칠게 내리꽂히는 그의 입맞춤은 벌처럼 쏘아대며 목덜미를 따라 퍼졌다.
순식간에 옷자락이 찢어지는 소리가 울렸고 나는 더 이상 몸을 가릴 수조차 없었다.
두려움에 내가 몸을 웅크렸으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술과 광기에 휘말린 그의 행위는,사랑이 아닌 징벌처럼 거칠고 무자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