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심선화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그리하거라.”
나는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말 타본 적 없어서 그러니 네가 좀 가르쳐다오.”
이렇게 말하고 경기장 안으로 들어간 나는 수행원의 도움으로 말에 올라탔다.
심선화의 승마 자세를 자세히 관찰하며 안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나서 나는 그녀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심선화는 정신병자를 쳐다보듯 나를 응시했다.
짝!
“악!”
말이 갑자기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하자, 나는 순간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 본능적으로 허리를 굽혀 말의 목을 꽉 잡았다.
심선화가 말을 타고 나를 쫓아왔다.
“소청옥! 그렇게 엎드리지 말고, 고삐를 당기며 앞을 똑바로 봐! 중심을 잘 잡고.”
나는 재빨리 마음을 가다듬고 심선화의 말대로 했다.
내가 중심을 잡자, 뒤따라온 심선화가 말 등을 딛고 일어서더니 내가 타고 있던 말 위로 착지했다.
그러고는 재빨리 고삐를 잡아당기자, 말은 앞다리를 높이 들었다가 그 자리에 멈췄다.
땅에 내려서도 다리가 여전히 약간 떨렸으나 나는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때, 말 엉덩이를 때린 수행원이 허겁지겁 달려오더니 고개를 숙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참으로 송구합니다, 우 부인. 소인은 부인께서 말을 탈 줄 아신다고 생각해서 그만...”
짝!
뺨 때리는 소리와 함께 수행원이 맞은 부위를 움켜쥐며 나를 바라보자, 나도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조금 전에 내가 말을 탈 줄 모른다고 말했거늘 이놈은 내 말을 귓등으로 들었네. 그리고 아까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던 것 같은데.’
“내가 말을 탈 줄 알든 모르든 왜 네가 말 엉덩이를 때리는가 말이다.”
그러고 나서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는 심선화를 향해 조금 전의 일과 전생의 일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참으로 고맙다, 선화야.”
심선화가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나도 담담히 미소 지으며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정신을 차린 심선화가 차가운 눈빛으로 수행원을 쏘아보며 말했다.
“내일부터는 나오지 말거라.”
나는 고개를 돌려 심선화를 바라보았다.
만약 내가 무슨 변고라도 생겼다면 선화는 책임을 피할 수 없으니, 수행원을 벌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이리 제멋대로인 수행원은 두지 않는 게 상책이야.’
수행원은 두려움에 가득 찬 얼굴을 한 채 무릎을 꿇었다.
“아씨, 제발 쫓아내지 말아 주십시오. 아씨께서 소청옥을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고 제가 대신 혼내주려고 했을 뿐입니다. 쫓겨나면 저는 굶어 죽어야 한단 말입니다. 제발요...”
심선화는 나를 쳐다보았다.
수행원이 고의로 한 짓이란 걸 아는 듯한 눈빛으로.
그러다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 심선화는 수행원을 발로 걷어찼다.
“이런 미친놈을 봤나! 혼내도 내가 직접 혼내면 될 일. 여봐라! 당장 이놈을 끌고 가라.”
우혁수와 그 일행들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긴 철천지원수와 함께 말을 타는 모습을 봤으니 놀랄 만도 하지.’
경기장에서 나오다가 나는 대문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성호를 봤다.
“아까는 자리를 양보해 줘서 고마웠다.”
그러자 나성호는 얼굴이 빨개진 채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별것도 아닌데요, 뭐. 청... 청옥 누님을 도울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얘가 별말을 다 하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나를 연모한다고 생각하겠어.’
“혹 시간은 되느냐? 이 누님이 밥 사줄게.”
밥을 사주려는 이유는 나성호가 조금 전 내게 자리를 양보한 것을 갚기 위해서였고, 그리고 나올 때 밥을 안 먹고 국물만 마셨던지라 허기가 져서였다.
나성호는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되... 되고 말고요.”
내가 저잣거리를 향해 걸어가자, 나성호가 긴장한 얼굴로 내 뒤를 따랐다.
우혁수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줄곧 저택에만 있다 보니 북적이는 거리를 바라보던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리고 워낙 저잣거리를 돌며 물품 사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고.
‘이번 생에는 나 자신을 위해 살 것이야.’
성창은 개방적인 나라라서 출가하지 않은 여인도 저잣거리에서 마음대로 활보할 수 있던 탓에 거리에는 여인이 적지 않았다.
내가 거리에 도착했을 때, 한 사람이 나의 주의를 끌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거리 한복판에서 서화를 팔고 있던 우아한 품격을 지닌 서생 허대성이었다.
그에 대해 나는 약간 인상이 있었다.
생원에 급제한 허대성은 하연주를 연모하고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찢어지게 가난해서 서화를 많이 팔아 하연주의 몸값을 치르려 해도 역부족이었다.
그에 비해 우혁수는 별로 힘을 들이지 않고 하연주를 구해냈으니, 허대성보다 훨씬 능력 있는 셈이었다.
전생에 허대성은 줄곧 하연주를 쫓아다녔으나 결국 나와 마찬가지로 우혁수와 하연주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나는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만약 내가 이자에게 연주의 몸값을 치를 정도의 은자를 준다면 연주와 혁수가 만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지. 그녀가 아니라도 혁수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 그럴 필요 없어.’
내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허대성이 이미 내 앞에 와 있었다.
“두 분 혹 서화가 필요하십니까? 이미 그린 것도 있으나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소생이 직접 그려드릴 수도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제 초상화를 그려주시겠습니까?”
내 말을 듣고 허대성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윤곽이 그럴듯하게 그려진 초상화가 완성되었다.
‘비록 혁수가 그린 연주의 초상화보다는 못해도 눈썹 사이의 주름도 그려 넣어서 그런지 나쁘지 않군.’
나는 고개를 돌려 다정과 다영을 쳐다보았다.
“이 사람의 서화를 다 사들이거라.”
‘왜 다 사냐고? 기뻐서. 혁수도 은자로 여인의 마음을 사는데 나라고 그리하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감격에 휩싸인 허대성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맙습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낭자.”
이 모습을 보며 나성호가 내게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결국 하지 않았다.
그때 멀지 않은 곳 2층 창가에서 우혁수가 차를 마시며 담담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으나 나는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송주림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우 부인이 오늘 평소하고 좀 달라 보여. 마치 혼인하기 전 모습처럼 말이야. 한데 무슨 일로 나성호와 함께 있는 걸까?”
그 말에 심선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보기에는 저년이 정신 나간 것 같습니다.”
도성의 귀족들은 대부분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혼인하기 전의 모습?’
우혁수는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내게 혼인을 강요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청옥 저년은 오만방자하고 야만적인 인간이었어.’
자신이 강제로 혼인 당했다고 생각하자, 우혁수의 눈썹 아래로 차가운 빛이 스쳤다.
‘내가 저년을 사랑하지 않으니 당연히 그 과거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없지.’
서화를 산 후, 나는 나성호를 데리고 주점에 들어갔다.
도성 최대의 주점인 운학루는 귀공자들과 규수들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
‘한데 혁수는 왜 이곳에 있는 거야?’
옆 방의 장지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아 나는 별실 안에 있던 네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그 사람들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나성호는 마치 바람피우다가 들킨 것처럼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별실은 이 하나만 남았으니 만약 두 분께서 불편하시다면 1층에 있는 대청에서 식사하셔도 됩니다.”
점소이가 말한 별실은 우혁수 일행들의 방 맞은편에 있었다.
“이 별실로 하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에 별실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자리를 뜬다면 혁수가 아마 더 이상해할 거야.’
잠시 망설이다가 나를 따라 들어온 나성호는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입을 열려고 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오해할 수도 있으니, 문을 열어두라고 말하려는 거겠지.’
그래서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나는 문을 쾅 닫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