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우혁수가 가지 않고 있어서 내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할 말이 남은 겁니까?”
그러자 우혁수가 차가운 표정을 한 채 답했다.
“왜 갑자기 이혼하려는가 했더니만 이제 보니 마음에 품은 사내가 있었구려.”
나는 코웃음을 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해서요? 화났다면 제게 이혼장이나 주세요.”
그 말에 우혁수의 안색이 말이 아니었다.
“부인! 어찌 이리도 뻔뻔스러운 것이오! 만에 하나 내 얼굴에 먹칠이라도 한다면 내 절대로 가만있지 않겠소. 부디 내 말 명심하길 바라오.”
또 이혼장을 주지 않아서 나는 우혁수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오후가 되어서야 완성된 그림을 바라보며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림을 말려서 잘 보관해 두거라. 오늘 입궁할 때 가져갈 것이다.”
내가 그린 것은 한 사내의 초상화였다.
천향 공주가 나들이를 나갔을 때 한 사내와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그 사내를 잊지 못한 적이 있었다.
전생에 하연주가 이 그림으로 천향 공주의 마음을 사로잡은 탓에 천향 공주도 그녀를 위해 사사건건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하연주와 경쟁하지 않으면 천향 공주도 나를 괴롭히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며칠 전에 김 재봉사가 지은 옷으로 갈아입은 후에 거울 앞에 선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맞춤 제작을 한 것처럼 너무 딱 들어맞아서.
하지만 나는 김 재봉사를 본 적이 없었다.
“마님, 나리께서 빨리 나오시라고 재촉하십니다.”
다영이 밖에서 걸어오는 것을 보고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왜 이리 인내심이 없는 거야.’
나는 더 이상 꾸물거리지 않고 다정과 다영을 데리고 서둘러 밖으로 걸어 나갔다.
우혁수는 대기하고 있던 마차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혼인한 지 3년, 우리가 함께 외출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내가 항상 준비를 마치고 그를 기다렸었다.
우혁수는 어제 본 초상화가 갑자기 생각났다.
‘요 며칠 동안 청옥이 왜 이리 변한 것일까? 정말로 그녀의 말대로 이제는 내가 싫어진 것인가? 차라리 잘 되었어. 이러면 이혼하기가 훨씬 수월해질지도 몰라.’
“가시지요.”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우혁수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비록 내가 매우 말랐으나 보기 싫을 정도는 아니었다.
원래 옥처럼 하얀 피부에 정교한 이목구비를 지닌 데다 정성껏 단장까지 하니
경국지색이 따로 없었다.
특히 소매 아래로 보일 듯 말 듯한 가느다란 팔은 사내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내 모습을 본 우혁수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옷이 어울리지 않으니 당장 갈아입으시오.”
나는 고개를 숙여 내 옷차림을 봤다.
성창은 개방적인 나라라서 이런 의상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내가 왜 보수적인 사상을 갖고 있는 이 사내의 말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어.’
“안 갈아입을 겁니다. 이런 제가 싫으시다면 마차를 각자 타시지요.”
‘오늘 밤 연회가 끝나면 혁수는 암살당하게 되겠지.’
전생에 나는 그를 보호하기 위해 자객의 칼에 대신 맞았었다.
이 일로 혁수가 나를 사랑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가 죽든 말든 상관하지 말고, 멀리 떨어져 있어야지. 이 기회에 이혼할 수 있다면 더 좋고. 수부라 외출할 때면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니 만약 따로 마차를 탄다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 뻔한 것은 물론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오라버니들도 그가 나를 괴롭혔다고 생각할 것이야.’
“어서 올라타시오.”
말을 마치고 우혁수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먼저 발을 들어 마차에 올라타자, 나도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뒤를 따라 올라탔다.
궁중 연회는 매우 떠들썩했다.
궁 입구에서 내린 우리가 어화원에 도착했을 때, 마침 연회가 시작되었다.
여인들과 사내들은 각각 한쪽 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사내들이 있는 첫 줄에는 몸이 좋지 않아 오지 않은 둘째 황자인 진현왕을 제외한 세 황자와 태자가 자리했고, 여인들이 앉은 자리에는 공주 몇 명이 전부였다.
오늘에 연 귀비의 딸이었던 삼공주 천향 공주의 생일이라 황제는 그녀를 첫 줄 가장 앞쪽에 앉혔다.
그리고 이들 중심에는 반백이 넘은 황제와 황후가 있었다.
대신들이 황제와 황후에 대한 예를 차린 후, 드디어 선물을 드릴 차례가 다가왔다.
나는 그림을 천향 공주의 손에 쥐여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공주 마마, 이 그림은 소인이 직접 그린 것이나 선물로 드리기에는 부족함이 많아서 몰래 감상하십시오.”
천향 공주가 고개를 돌려 시큰둥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천향 공주가 왜 이런 표정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미모를 지닌 나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생일에 그림 한 폭만 선물했으니 어쩌면 마음속에 불만이 가득할지도.’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부족함이 많다니요. 참으로 겸손하십니다. 우 부인이 손재주가 좋다는 말을 내 익히 들어서 알고 있으니 이 그림도 필시 걸작이 틀림없을 터.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감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네요.”
말하면서 공천향이 천천히 초상화를 열기 시작했으나 나는 이를 막지 않았다.
그녀가 완전히 펼쳐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니나 다를까, 초상화를 반쯤 펼치고 나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공천향은 기쁨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런 다음 사람들이 호기심과 의아함을 뒤로한 채 그녀는 재빨리 초상화를 접었다.
“역시 우 부인은 솜씨가 대단하네요. 하면 이 그림을 두고두고 혼자 감상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천향아, 대체 무슨 그림이길래 입이 귀에 걸린 것이냐? 짐에게 한 번만 보여줄 수 없겠느냐?”
공천향이 그림을 품에 껴안으며 말했다.
“그저 우리 여인들이 좋아하는 그림일 뿐 별것이 아니오니 나중에 보여드리면 아니 되겠사옵니까? 아바마마.”
“하하! 그래, 그래. 천향을 기쁘게 해드렸으니 짐이 우 부인에게 상을 내리도록 하겠다.”
나는 무릎을 꿇으며 서둘러 감사 인사를 드렸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폐하.”
“어서 일어나거라.”
“자객이다!!! 어서 폐하를 호위하라!”
일어서기 바쁘게 비수가 얼굴 옆을 스치며 황제를 향해 날아가는 것을 보고 나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대체 어찌 된 일이야? 전생에 자객은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있었는데. 그리고 자객이 노린 사람도 황제가 아닌 혁수였고. 연회장에 자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나의 환생으로 인해 변화가 생겼던 걸까?’
내가 생각에 잠겨있을 때, 누군가 나의 팔을 잡아당기며 한쪽 구석으로 끌고 갔다.
“그리 넋 놓고 있다가 죽을 수도 있소.”
나는 고개를 들어 차가운 눈빛으로 우혁수를 쳐다보며 손을 뺐다.
“고맙습니다.”
자객들은 어느새 우림군, 무장들과 싸우고 있었고, 심선화도 싸움에 뛰어들었다.
그 순간, 나는 한 자객이 심선화를 향해 찌르려는 것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선화야!!!”
말보다 행동이 빨랐던 나는 심선화를 위해 자객이 휘두른 칼을 몸으로 막았다.
‘치명상을 피할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한 것도 너무 아프네.’
고개를 돌린 심선화는 놀란 눈빛을 한 채 넋 놓고 있다가 단칼에 자객을 죽인 다음 나를 안았다.
“소청옥! 너 미쳤어?”
나는 고개를 들어 심선화를 바라보았다.
“네게 진 빚을 이것으로 대신하자...”
이렇게 말한 뒤, 나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청옥아... 흑흑... 어찌 이럴 수가...”
눈을 떠보니 진혜영이 눈물범벅이 된 채 울고 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보니 우혁수와 그 아버지인 우해산도 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너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은 진혜영을 바라보며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마음이 이렇게 따뜻한 분이 왜 나를 저버리게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