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약을 잘못 먹었나?
도윤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백아린의 발밑에서 손을 빼냈다. 이내 벌떡 일어나서 다급히 설명했다.
“오해야! 그런 게 아니라...”
하지만 마땅한 변명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핑계 댈 생각하지 말고 부모님이나 부르는 게 어때? 아, 참. 경찰서에 불려갈 수도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 너희 둘 명예훼손죄로 고소할 예정이거든.”
백아린은 친절하게 일러준 뒤 도윤재의 처참한 몰골을 훑어보았다. 이내 흡족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고, 속이 다 후련했다.
드디어 도윤재의 코를 납작하게 한 날이 오다니.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백아린!”
도윤재가 큰 소리로 외쳤지만 백아린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결국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커다란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젠장, 사람들 앞에서 웃음거리가 되다니! 반드시 백아린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문자 한 통을 보냈다.
강의동 3층, 한 남자가 오른쪽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난간에 기대어 있었다. 몸에 딱 맞는 핸드 메이드 검은색 맞춤 정장은 고귀하고 냉철한 분위기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당당한 모습은 마치 만인을 지배하는 왕을 연상케 했다.
밖에서 벌어지는 실랑이를 묵묵히 지켜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저 아이가 할아버지께서 선택한 내 약혼자라고?”
“네, 맞아요.”
비서 한지석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각지에서 선발된 후보들의 혈액 검사를 통해 백아린 씨의 유전자가 가장 우수하다는 결과가 나왔어요. 다만...”
충격적인 외모에 할 말을 잃었다.
게다가 성질마저 더러우니...
상사가 자칫 화라도 낼까 봐 한지석은 넌지시 물었다.
“만약 마음에 안 드신다면 새로운 후보로 알아볼까요?”
“아니.”
남자의 머릿속에는 회심의 돌려차기로 도윤재를 쓰러뜨리던 백아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이에 걸맞지 않은 침착하고 성숙한 눈빛까지.
이내 흥미로운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여간내기가 아니네. 직접 만나봐야겠어.”
말을 마치고 우아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내려갔다.
한지석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지금 뭘 들은 거지? 대표님이 폭탄 머리 불량 여고생을 찾아간다니?
여태껏 여자에게 호감을 보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분인데, 설마 오늘 약이라도 잘못 드신 건가?
결국 궁금한 나머지 얼른 따라가서 두 눈으로 확인하려고 했다.
한편, 백아린은 경찰에 신고하러 간다며 학교를 나섰다. 길을 걷다가 주변 사람의 시선이 느껴지자 자기 머리를 쥐어박았다.
도윤재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라고 해서 철석같이 믿고 일부러 과장되게 꾸미고 다녔다.
그때는 왜 이렇게 멍청했는지, 지능은 물론 심미안마저 잃어버린 듯했다.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마침 미용실이 눈에 들어왔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이내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검은색으로 염색하고 매직 해주세요.”
“알았어.”
중년의 미용사가 다가와 머리를 감고 시술을 시작했다.
30분 후, 시뻘건 폭탄 머리는 윤기 나는 직모로 변해 어깨까지 차분히 내려앉았다. 검은색 생머리 덕분에 누렇게 떠 있던 피부도 훨씬 환해 보였다.
갈라진 입술은 오히려 애잔한 느낌마저 들었다.
통통한 얼굴도 사실 살이 찐 게 아니라 아직 젖살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5:5 가르마를 하니 전체적인 분위기가 훨씬 더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백아린은 거울 속의 모습을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하려고 주머니를 더듬는 순간 지갑이 없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이럴 수가! 아직 학생이라는 것을 잊다니. 매일 만 원도 안 되는 용돈을 받아서 도윤재에게 잘 보이려고 이것저것 사주느라 다 써버렸다.
‘젠장.’
백아린은 미용사를 바라보며 머쓱하게 말했다.
“아저씨, 죄송해요. 제가 지갑을 깜빡했네요. 혹시 학생증을 맡기고 집에 가서 돈을 가져와도 될까요? 30분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면 직접 학교로 찾아오셔도 돼요.”
근처에는 고등학교가 한 곳뿐이다. 미용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학생증을 받아들었다.
“알았어.”
하지만 학생증에 적힌 이름을 보자 온화한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백아린, 너였어? 이 동네에서 도둑질을 그렇게 많이 하고 이제 우리 가게까지 노리는 거야? 어제 불량배랑 모텔에서 경찰에 붙잡힌 걸 모르는 줄 알아? 오늘 퇴학당하고는 학교로 찾아가라니? 내가 바보냐?”
머릿속으로는 예전에 했던 못된 짓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전부 도윤재가 부추긴 탓이었다.
귓가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맴돌았다.
“아린아, 이 휴대폰 진짜 예쁘다. 근데 우린 돈이 없잖아. 훔칠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도둑질은 부끄러운 게 아니야. 물건을 너무 비싸게 파는 탓이지. 우린 부자를 털어 가난한 사람을 돕는 거야. 젊을 때 일탈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어?”
“아린아, 남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마. 내 마음속에선 넌 항상 당당하고 과감한 여장부니까. 난 그런 네가 정말 좋아!”
...
전생의 그녀는 정말 바보였다.
스스로도 싸대기를 몇 대 날리고 싶은 심정인데 불같이 화를 내는 사장의 마음도 이해는 갔다.
그녀는 끈기 있게 설명했다.
“아저씨, 진실은 이미 다 밝혀졌어요. 저는 무고해요. 정 못 믿으시겠다면 이거라도 보세요.”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려던 찰나 중년 남성이 불쑥 말을 가로챘다.
“보긴 뭘 봐? 내가 너한테 사기당한 사람들처럼 만만해 보여? 잘 들어. 당장 돈을 내놓든가, 아니면 네 부모님 대신 제대로 혼내줄 테니 오늘 아주 죽을 각오 해.”
말을 마치고 그녀의 옷깃을 덥석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