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유일무이한 존재
이때, 스텝 2명이 다가와 백아린의 팔을 양쪽에서 고정했다.
키가 160cm에 불과한 그녀는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라 인형처럼 대롱대롱 매달렸다.
전생에 나름 유명한 인플루언서였고, 태권도를 비롯한 각종 호신술에도 능해 이런 푸대접을 받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눈빛이 저도 모르게 싸늘하게 식어갔다.
“어디서 감히 눈을 부라려? 내가 사회생활 시작했을 때 넌 아직 기저귀 차고 있었거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가! 오늘 본때를 보여주마!”
중년 남성이 화를 내더니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백아린의 얼굴을 향해 따귀를 날리려고 했다.
양팔이 붙잡힌 상황에서 발버둥 쳐봤자 꿈쩍도 안 했다.
바람을 가르며 손바닥이 점점 가까워졌고, 얼굴에 닿기 직전 외마디 비명과 함께 중년 남성과 두 명의 스텝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중심을 잃은 백아린은 몸이 휘청거렸다.
무의식중으로 뭐라도 붙잡고 일어서려고 했으나 곧바로 넓고 단단한 품에 안겼다.
고개를 들자 숨이 멎을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피부는 백옥처럼 희고 투명했으며, 뚜렷한 이목구비는 마치 신이 정성을 다해 빚어낸 걸작 같았다. 정교한 윤곽은 물론 선 하나하나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그중에서도 길게 뻗은 눈매는 특유의 무심하고 싸늘한 기운을 풍겼고 바라보기만 해도 저절로 빠져들었다.
남자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작고 가녀린 몸이 단단한 품에 가려졌고, 짙고 강렬한 수컷 향이 코끝을 스쳤다.
두근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설렘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이성을 되찾은 백아린은 얼른 품에서 벗어나 거리를 두며 조심스레 물었다.
“강 대표님이 여긴 무슨 일로...”
“강 대표님?”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강 씨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백아린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이런! 말실수하다니.
전생에서도 강태준은 오늘 찾아와 개과천선만 하면 그녀와 결혼해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 생에는 처음 만나는 상황이지 않은가?
그때는 도윤재를 위해 강태준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이상하리만치 그에 대한 호기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뒤늦게 관심 두기 시작했고, 나중에서야 H국 전역을 뒤흔든 전설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2살에 사업을 시작해 17살에 강씨 가문의 산업을 전국으로 확장했고, 22살에는 세계 시장으로 뻗어나가 25살에는 재계 1위로 급부상했다.
그야말로 치트키라도 쓴 듯한 삶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인물로 한 번 적으로 간주된 자는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한다고 했다.
또한, 유전자가 뛰어난 여성을 찾는 이유는 본인이 아이를 가질 수 없어 시험관 시술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루머도 돌고 있었다.
이건 남자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 행여나 비밀을 아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눈치채기라도 한다면 입막음을 위해 그녀를 죽일지도 모른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고, 백아린은 황급히 변명했다.
“그냥 컴퓨터 하다가 우연히 경제 뉴스에서 본 것 같아요.”
“그래? 어떤 사이트인데? 기사에 뭐라고 썼어?”
강태준이 바짝 다가왔다. 흑요석처럼 새까만 눈동자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추궁했다.
말투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백아린은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강태준처럼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사람 앞에서 어눌한 변명이라고 했다간 바로 들킬 게 뻔했다.
더군다나 아직은 강태준에 관한 기사를 본 적이 없어서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완벽하게 빠져나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한창 머리를 굴리던 찰나 남자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며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넌 백아린이 아니야. 대체 누구지?”
오늘 이른 시간에 학교에 도착한 그는 조금 전 단상 위에서 벌을 서고 있던 백아린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우물쭈물하고 시선은 불안하게 흔들렸으며 조금만 건드려도 금방 부서질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말없이 가만히 있어도 눈빛이 또렷했고 여우처럼 영리했다.
아예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었기에 의심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백아린의 동공이 흔들렸다. 지금 그녀에게 누구냐고 물어본 건가? 설마...
이내 당혹감을 애써 억누르며 눈살을 찌푸린 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강태준을 바라보았다.
“대표님, 무슨 말씀이세요? 저예요, 백아린. 유일무이한 존재. 이 세상에 저랑 똑같게 성형할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아시죠? 저 빈털터리 불량소녀인 거. 설령 성형한다고 해도 부잣집 아가씨나 따라 하겠죠.”
“예전의 백아린이라면 이렇게 임기응변이 뛰어나지 않았을 텐데. 게다가 우리 할아버지가 점 찍어둔 강씨 가문의 며느리가 빈털터리라니 말이 안 되잖아.”
강태준이 냉소를 지으며 비아냥거렸다. 그리고 가녀린 팔을 따라 손을 천천히 위로 올렸다.
백아린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속으로는 덜컥 겁이 났지만 표정만큼은 아무렇지 않은 척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강씨 가문의 며느리요? 제가요?”
“애송이, 연기 잘하네. 마침 우리 회사에서 투자한 로맨스 드라마에 주인공이 비어 있는데 한번 도전해 볼래?”
강태준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냉소적인 미소는 섬뜩할 정도였고 그윽한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정말요?”
백아린은 그를 애써 무시하고 환하게 웃었다.
“몰래 신인 발굴하러 여기까지 오신 거였어요? 영광인데, 제가 선택받다니... 꺄악!”
하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뼈마디가 선명한 커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목덜미를 거칠게 움켜잡았다.
“연기 그만해.”
강태준은 눈앞의 여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백아린, 시골의 허름한 재봉점 노파가 주운 고아. 도둑질에 거짓말까지 온갖 악행을 저지르던 문제아였지. 하지만 진짜 정체는 백경 그룹, 백씨 가문의 장녀이자 백은호 회장이 가장 아끼는 손녀. 만약 내 예상이 맞는다면 그동안 일부러 어리숙한 척하며 때를 노린 거겠지. 네 진짜 목적이 뭐야? 꿍꿍이가 있는 게 확실해.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유전자 검사에서 최우수 등급이 나왔어? 나한테 접근한 이유는 뭐지?”
그의 추궁은 조목조목 논리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