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어울릴만한 사람
강태준이 그녀의 과거를 이토록 철저히 파헤쳤을 줄이야.
놀람도 잠시, 곧이어 매혹적이면서도 영리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들켜버렸네요. 그럼 이제 더는 숨길 이유도 없겠죠? 말씀하신 대로예요. 그동안 반격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건 백씨 가문, 그리고 내 것이었던 모든 걸 되찾기 위해서였어요.”
말을 이어가던 백아린의 눈동자에는 짙은 슬픔이 스며들었다. 이내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저를 조사했다면 아시겠죠? 비록 할아버지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늘 눈엣가시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죽게 한 아이, 백씨 가문을 위기에 빠뜨린 재앙 덩어리, 모두가 저를 불길한 존재로 여겼죠. 그러나 전부 계모가 꾸민 짓이었어요. 그 여자는 우리 엄마가 가졌어야 할 모든 걸 빼앗았고 엄마의 목숨은 물론 저까지 없애려 했죠. 심지어 도윤재조차 절 잘못된 길로 끌어들이려고 일부러 곁에 심어 놓은 미끼였어요. 그런 상황에서 내 패를 다 드러내면 쓰레기 같은 인간들에게 무슨 수로 복수한단 말이에요?”
깡마른 몸을 곧게 세운 여자의 모습은 묘하게 가슴을 저리게 만들었다.
설령 강태준일지언정 그 순간만큼은 자기도 모르게 넋을 잃고 말았다.
백아린은 남자의 반응을 보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눈가에 물기를 머금은 채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유전자 검사 어쩌고 하는 건 그냥 길 가다가 피를 뽑으면 10만 원 준다는 간판을 보고 돈이 급해서 했죠. 강씨 가문에서 며느리 후보를 고르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하지만 대표님을 직접 만나고 나니 이제는 정말... 다른 목적이 생겨버렸네요?”
이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며 자신만만하게 긴 생머리를 뒤로 넘겼다. 그리고 당당한 표정으로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대표님에겐 유전자가 우수한 아내가 필요하고 전 든든한 배경이 절실하죠. 그렇다면 우리, 계약 결혼해 볼래요?”
계약 결혼이라...
강태준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시선은 그녀의 몸을 향했고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헐렁한 교복과 통통한 얼굴, 앳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특히 옷이 커서 그런지 앞이 완전히 평평했다.
강태준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애송이랑 어떻게 결혼해?”
말투에는 의미심장한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남자의 시선이 쇄골 아래로 향하는 것을 눈치챈 백아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내 발끈하며 반박했다.
“애송이라니? 저 올해 18살이에요! 그리고 나중에는 G컵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죠.”
“그래? 기다릴 테니까 그때 다시 찾아와.”
강태준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훑어보며 웃는 둥 마는 둥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마치 그날은 절대 오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눈빛이었다.
비아냥거리는 강태준을 보자 백아린은 당장이라도 7년 뒤 사진을 그의 얼굴에 던져주고 싶었다.
당시 인기 스트리머였던 그녀는 몸매 관리에도 철저해서 복근, 가슴, 엉덩이까지 없는 게 없었다.
물론 이번 생에는 7년 뒤에 어떤 모습일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도윤재와 백시연을 떠올리는 순간 마음속으로 다시 의지가 불타올랐다.
7년 후에는 전생보다 훨씬 더 눈부시고 멋진 삶을 살 거라 다짐했다.
스트리머 따위 하지 않고 새로운 인생 전성기를 맞이할 것이다.
이내 새빨간 입술로 호를 그리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대표님, 저 같은 유망주를 놓치면 후회하실 텐데. 몇 년만 지나면 청혼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설걸요? 지금 선점 안 해도 괜찮겠어요?”
앳된 얼굴에 생기가 넘쳤고, 작고 여린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당당함과 자부심은 남달랐다.
괜스레 허풍이 아니라 정말 그런 능력이 있을 것만 같은 착각마저 들게 했다.
강태준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눈동자는 유난히 맑고 투명했고, 마치 눈 속에 묻힌 수정을 연상케 했다.
그에게 접근하는 여자가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이렇게 순수한 눈빛은 처음이었다.
결국 속으로 결심을 내렸다. 이내 바지 주머니에서 반지 하나를 꺼내 그녀의 약지에 끼워주었다.
“유망주를 놓칠 수는 없지. 오늘부터 넌 내 여자야.”
그리고 앙증맞은 손을 잡고 고개를 숙여 손등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
백아린은 눈 앞에 펼쳐진 동화 같은 장면에 넋을 잃고 말았다. 진도가 너무 빠른데...?
하지만 다시 태어난 인생, 언젠가 반드시 재벌가에 시집가서 빌어먹을 연놈에게 제대로 복수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녀의 입술이 완벽한 곡선을 그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과 충분히 어울릴만한 사람이 될 테니까 기다려줘요.”
말을 마치고 까치발을 들어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여우처럼 영리하고 반짝이는 눈동자로 장난스럽게 윙크하고 나서야 돌아섰다.
걸음걸이는 자신감과 에너지가 넘쳤다.
강태준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들어 입술을 만져보았다.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감돌자 자기도 모르게 몸이 바짝 굳었다.
젠장, 그토록 자부하던 자제력이 겨우 한 소녀 앞에서 무너질 줄이야.
속으로는 은근히 기대했다.
이때 한지석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표님, 그 반지는 회장님께서 사모님을 위해 준비하신 건데 진짜 괜찮으시겠어요?”
“왜? 지금 내 안목을 의심하는 건가?”
강태준이 불쾌한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한지석은 흠칫 놀라더니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단지... 이미 마음을 정하신 거라면 사모님을 도와드리는 게 어떨까 해서요. 어쨌거나 현재 처한 상황이 좀 그렇잖아요.”
“아니야. 오히려 궁금하네.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강태준은 조금 전 자신과 어울릴 만한 사람이 되겠다고 호언장담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자 기대감이 차올랐다. 곧이어 발걸음을 돌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잠시 후 우뚝 멈춰서더니 싸늘하면서도 위엄 어린 어조로 지시했다.
“대신 사람을 붙여. 앞으로 백아린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도록 해. 내가 ‘사들인’ 유망주인데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다치면...”
어느덧 공기 중에 살기가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