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만약 가족에게 알린다면 가장 가까운 사람이 바로 그녀의 남편 도서찬이었다. 라소린은 그 생각을 잠시 접어두었다.
“사실 약물치료도 좋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평소 받았던 치료도 꾸준히 받으셔야 해요.”
황노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럼 오늘은 최면 치료를 해보도록 하죠.”
라소린이 계속 말했다.
‘최면 치료라...’
황노을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소린과 함께 의자 앞으로 다가가 누운 다음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많은 것들이 뒤죽박죽이었다. 다시 의식을 되찾았을 땐 음침한 날이었다.
황노을은 곧바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었다. 차가운 백열등, 소름 끼칠 정도로 조용한 환경, 눈앞에 나타난 건 흰 천에 싸인 아버지의 시신이었다.
그건 몇 년 전 아버지의 시신을 확인하러 갔던 날이었다. 어머니는 이미 옆에서 통곡하고 있었고 그녀는 그저 아버지의 창백한 얼굴을 멍하니 쳐다만 봤다.
그해 아버지는 건물에서 몸을 던졌다. 모녀와 엉망진창이 된 황씨 가문만 남겨둔 채.
갑자기 풍경이 바뀌었고 황노을은 황씨 가문의 회사 건물 아래에 서 있었다. 아버지의 피가 사방에 흥건했고 황노을은 눈조차 감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쳐다봤다.
주변이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어머니의 절규와 황씨 가문의 추악한 면모를 욕하는 소리가 한데 뒤섞였다. 그들은 모녀의 마지막 살점까지 뜯어내려 했고 도무지 저항할 수 없었다.
결국 황노을은 아버지의 피 위에 넘어져 뒹굴었다. 사방에 으르렁거리는 늑대들로 가득했다.
그때 신발 한 켤레가 눈에 들어왔다.
“노을아, 우리 도씨 가문에서 지켜줄게.”
앳되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노을이 고개를 들어보니 나이는 어리지만 이미 리더의 기세를 갖춘 도서찬이었다.
단정하고 깔끔한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눈빛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치명적인 마력이라도 지녔는지 황노을을 바로 진정시켰다.
“문제 생기면 저 도서찬을 찾아오세요.”
그의 눈짓 한 번에 뒤따르던 사람들이 질서 있게 움직였다. 청산, 정리 등 도씨 가문 사람들이 다 처리해줬다.
도서찬은 늑대들을 뒤로하고 쪼그리고 앉은 채 그녀의 얼굴에 묻은 피와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아줬다.
“나랑 가자.”
도서찬이 손을 내밀자 황노을은 망설임 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손바닥이 따뜻하면서도 건조했다.
...
25살의 황노을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잠시 후 천천히 눈을 떴다.
그 후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도서찬은 그녀와 어머니를 데리고 끔찍한 그곳을 벗어났고 도씨 가문의 지위를 이용해 모든 일을 해결했다.
비록 황씨 가문이 몰락하고 황노을은 더 이상 풍족했던 삶을 누릴 수 없게 되었지만 다행인 건 그녀와 어머니 모두 무사했다.
그러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실 내려놓는 건 한순간이었다.
황노을은 눈을 감고 얼굴을 찌푸렸다. 통증이 심장에서부터 손끝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걸 지켜본 라소린이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직 그분을 완전히 내려놓지 못하신 것 같네요.”
황노을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눈가의 눈물을 닦아냈다.
“이미 내려놨어요.”
다시 눈을 떴을 때 황노을의 눈빛은 평온해져 있었다.
과거는 과거이고 현재는 현재다. 황씨 가문의 일은 스스로 직면하고 해결해야 했다.
도서찬이 사랑하는 사람은 한연서이고 황노을에게 깊은 상처를 줬으니 더 이상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어머니가 후에 재혼하여 새아버지와 함께했던 것처럼 각자의 길이 있었다. 이미 결정했으니 꼭 그를 놓아줄 것이다.
라소린은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소린이 근무하는 병원은 도산 병원이 아닌 해당 자격을 갖춘 요양원이었고 환자들 대부분이 자산가들이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높은 수준의 비밀 유지와 편안함을 요구했다. 그리고 병력도 별도로 보관하고 있었고 요양원 내부에서만 접근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황노을이 이곳을 선택한 이유였다. 황노을은 다른 사람이 그녀의 병을 아는 걸 원치 않았다. 하여 절친인 임지은조차도 알지 못했다.
추가적인 심리 상담을 마친 후 라소린은 황노을에게 약을 처방했다. 황노을은 약을 가지고 요양원을 나와 차에 올랐다.
약통에 복용법이 적혀 있었다. 마침 옆에 물 한 병이 있어 지금 바로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황노을은 망설였고 배를 내려다봤다.
‘아이를 지운 다음에 먹자. 며칠 늦게 먹는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닌데.’
그러고는 약을 따로 챙겨뒀다.
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는데 [신의 목소리]에 대한 푸시 알림이었다. 확인해보니 대부분 한연서에 관한 내용이었다.
기사마다 엄청난 조회 수를 자랑했다.
[한연서 음악 예능 출연.]
[한연서, 신의 목소리.]
[한연서, 음악계의 유일무이한 순수녀.]
푸시 알림에 한연서가 새 영상을 업로드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영상 속 한연서는 매우 쇠약해 보였지만 얼굴에는 강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부서질 것 같으면서도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맞아요. [신의 목소리] 제작진이 저를 초대해주셨어요. 프로그램의 구성과 내용을 봤는데 매우 흥미로워서 심사위원으로 출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며칠 뒤에 첫 방송이고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물론 음악 예능이니만큼 저도 직접 만든 곡 하나를 선보일 것입니다.”
한연서는 말하는 내내 미소를 잃지 않았다. 살짝 핏발이 선 눈과 새하얀 피부가 보는 이를 안타깝게 했다.
“저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알게 된 후에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사랑과 증오, 절망과 해탈을 통해 영감을 얻어 이 곡을 썼습니다. 이 곡은 [신의 목소리] 생방송 당일 음악 플랫폼에 동시 공개될 예정입니다. 제 노래가 여러분에게 힘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상의 배경이 비비안 플라워 스튜디오라 다양한 꽃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한연서는 꽃에 둘러싸인 채 시청자들에게 인사했다.
이 영상이 공개된 후 연예 뉴스 해설원은 내용을 추가로 덧붙였다.
“내부 관계자에 따르면 한연서 씨가 직접 작곡, 작사하고 부른 이 곡의 퀄리티가 매우 높다고 합니다. 녹화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들었어요. 한연서 씨가 꽃꽂이뿐만 아니라 작곡에도 이렇게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후 댓글도 칭찬 일색이었다. 인터넷에 한연서의 자작곡이라고 주장하는 짧은 구간이 공개됐는데 단 25초의 반주만으로도 이미 엄청난 화제를 몰았다.
수많은 영상 크리에이터들이 25초의 반주를 배경 음악으로 사용했고 문학, 비주얼, 심지어 반려동물 관련 콘텐츠까지 모두 대박을 터뜨렸다.
네티즌들이 한연서의 영상 아래에 댓글을 남겼다.
[대박. 한연서 씨가 곡까지 이렇게 잘 만들 줄은 몰랐어요. 그 25초를 계속 반복 재생 중이에요. 전체 곡이 너무 기대돼요.]
[외모도 아름답고 사업도 잘하고 작곡까지 완벽하게 잘하는 한연서 씨가 6개월밖에 못 산다는 게 너무 아쉬워요.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요.]
[황노을 씨는 평생을 노력해도 한연서 씨 25초에도 미치지 못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