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A시 해그림원 침실.
격정의 물결이 출렁이는 침대 위, 남자는 여자의 가슴에 난 점에 부드럽게 입맞춤했다.
뜨거웠던 시간이 지난 후 도서찬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우리 이혼해.”
도서찬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차분했다.
황노을은 아직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몸을 돌려 그의 깊고 검은 눈을 바라보았다. 결혼한 지 이제 겨우 1년, 도서찬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연서 위암이래. 6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았어.”
도서찬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피어오르는 연기에 그의 얼굴이 흐릿해졌다.
“죽기 전에 내 아내로 살아보는 게 평생의 유일한 소원이라고 하더라.”
황노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넓은 침실 안에 정적만이 감돌았다.
침대 옆 작은 스탠드 불빛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벽에 드리웠다. 아주 가까운 거리였지만 그림자의 거리는 멀기만 했다.
그녀가 바로 대답하지 않자 도서찬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냥 좀 달래주려고 그러는 거야.”
도서찬이 말을 이었다.
“6개월 후에 재혼하면 돼. 노을아, 연서한테 남은 시간이 6개월밖에 없어.”
그의 목소리는 일상적인 통보라도 하듯 차분하기만 했다.
황노을은 그의 옆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의 요구가 무엇이든 반드시 들어야 한다는 강압이 느껴졌다. 마치 그의 말이 어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다. 두 사람의 결혼은 황노을이 끈질기게 매달린 끝에 얻어낸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도서찬을 좋아했고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그의 곁만 맴돌았다.
그해 폭우가 쏟아지던 날, 도서찬은 황노을의 앞을 막아서면서 손에 부러진 나무를 쥔 채 그녀의 새아버지에게 경고했다.
“또 노을이를 건드렸다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그때 황노을은 정말 죽도록 맞았다. 굵은 빗줄기와 붉게 번지는 피 사이로 나무를 꽉 쥐어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한 그의 손, 그리고 얼음장처럼 차갑고 단호했던 그의 눈빛이 보였다.
도서찬은 그녀의 목숨을 구해줬고 그 후로 그녀는 도서찬에게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의 요구가 무엇이든 목숨을 걸어서라도 누구보다 완벽하게 해냈다. 그리고 일이 끝나면 언제나 황노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나지막하게 칭찬했다.
“노을아, 정말 잘했어.”
도서찬의 말과 입맞춤이 늘 가볍고 두 사람 사이도 뜨뜻미지근했지만 황노을은 그의 성격이 그런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여 모두가 황노을을 자존심도 없이 남자에게 매달린다고 손가락질해도 황노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7년이라는 시간 동안 도서찬밖에 모르고 살았다.
1년 전 도서찬 할아버지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도씨 가문 사람들은 논의 끝에 액운을 물리치고자 도서찬에게 결혼하라고 했다.
그때 도서찬은 황노을을 찾아왔고 두 사람은 혼인신고를 했다.
황노을은 수년간의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맺는다고 생각했으나 결혼 후 도서찬은 그녀를 멀리했고 심지어 혐오하기까지 했다.
“황노을, 내 말 듣고 있어?”
그녀가 딴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듯 얼굴을 찌푸리며 쳐다봤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해요?”
황노을의 질문에 도서찬은 대답하지 않고 다른 얘기를 했다.
“연서 참 가여운 애야.”
“그럼 나는요?”
저도 모르게 이 한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도서찬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깊은 눈동자에 약간의 짜증이 스쳐 지나갔다가 약 3초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노을아, 연서 곧 죽어. 연서는 날 사랑하고 있지만 나랑 결혼한 너한테 상처 줄까 봐 지금까지 꾹 참았어. 연서랑 나 선을 넘은 적이 한 번도 없었어. 내가 연서한테 뭘 해주겠다고 해도 항상 거절했어. 연서 착한 애야. 이번 한 번만 네가 양보하면 안 될까? 네가 잔인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지 마.”
얼음장같이 차가운 도서찬의 목소리에 황노을은 심장이 칼로 도려내듯 아팠다.
유부남을 만나는 여자는 착한 여자고 남편을 양보하지 않는 아내는 잔인하고 나쁜 여자라니.
황노을은 몇 년 전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는 도서찬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깊은 눈매, 오뚝한 콧날, 날카로운 얇은 입술...
도서찬이 대체 언제부터 변하기 시작했을까? 아마 ‘그녀’가 나타난 그날부터였을 것이다.
“정말 나랑 이혼할 거예요?”
황노을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도서찬은 대답하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응. 너...”
“알았어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노을이 대답했다.
순간 멈칫한 도서찬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꿰뚫어 보듯 쳐다봤다.
“많이 변했다, 너?”
그의 목소리에 웬일로 분노가 섞여 있었다.
“너의 동의가 무조건 필요하다는 걸 알고 날 협박이라도 하려고?”
황노을은 입을 꾹 다문 채 하얀 벽에 비친 두 사람의 그림자를 조용히 쳐다봤다.
도서찬은 더는 뭐라 하지 않고 손에 든 담배를 비벼 끈 후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생각은 어떠한지, 그의 요구가 그녀에게 얼마나 큰 모욕을 줬는지,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든 건지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도서찬은 잘 알고 있었다. 황노을이 절대 그를 떠나지 못한다는 것을. 수년 동안 언제나 그래왔으니까.
쾅.
도서찬이 문을 세게 닫고 나갔고 침실에는 이제 황노을 혼자만 남았다. 그가 닫고 간 문을 말없이 쳐다보며 침대 머리맡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웅웅.
그때 문자가 도착했다. 핸드폰을 집어 들고 확인했는데 ‘그녀의 다른 번호’로 저장된 사람에게서 온 문자였다.
[서찬 오빠 또 나 보러 왔어요.]
그리고 현관 유리에 비친 도서찬의 옆모습을 찍은 사진 한 장을 보냈다.
그의 얼굴에 황노을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 있었다. 황노을은 손가락을 멈칫했다가 위로 스크롤 했다.
[오빠 마음속에 내가 있대요.]
그리고 그 위의 문자는 이러했다.
[비 오는 밤이라 많이 춥죠? 하지만 난 안 추워요. 오빠가 옆에 있어서.]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야말로 내연녀예요. 황노을 씨는 그냥 서찬 오빠가 액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선택이에요. 오빠는 내 안목을 높이 사주고 내 취향을 존중해줘요. 오빠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라고요.]
...
이와 같은 문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 이 모든 것들은 전부 도서찬이 황노을을 배신했다는 증거들이었다.
7년 동안 늘 무뚝뚝하기만 하던 도서찬이 다른 사람 앞에서는 이토록 활기가 넘칠 줄은 전혀 몰랐다.
아무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스크롤 하다가 그녀가 보낸 첫 문자에 멈췄다.
[내가 누군지 알죠? 오늘 거실에 놓은 꽃 어때요? 내가 선물한 건데 오빠가 예쁘다고 했어요.]
‘허...’
그녀가 누구인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화려한 별장이나 펜트하우스 등에 꽃장식을 해주는 것으로 이름을 알린 플로리스트 한연서였다.
사실 이 문자들을 도서찬에게 보여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연서가 보냈다는 증거가 없다고 했고 심지어 황노을이 일부러 다른 번호로 자신에게 보내 한연서를 모함하는 게 아니냐고 의심했다.
왜냐하면 사진이 거의 없었고 있다고 해도 아무나 쉽게 옆에서 찍을 수 있는 평범한 사진들이었다.
오늘 보낸 사진만 제외하고.
이 사진을 도서찬에게 보여줘야 할까?
황노을은 핸드폰을 옆에 던지고 침대 서랍 맨 아래에서 서류 봉투를 하나 꺼냈다. 그 안에 오늘 낮에 막 받아온 임신 진단서가 있었다.
그녀는 도서찬의 아이를 가졌다. 가장 부적절한 시기에.
눈물 한 방울이 진단서 위에 떨어져 넓게 번졌다.
도서찬의 마음은 진작 그녀에게서 떠났는데 증명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녀는 눈물을 닦아내고 도서찬의 라이터를 집어 들어 진단서를 불태웠다.
도서찬은 아마 모를 것이다. 이혼이 그녀가 들어주는 마지막 요구라는 것을.
7년 동안 도서찬에게 은혜를 충분히 갚았다. 더는 그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