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다음 날 가정 법원 앞 주차장.
도서찬은 마이바흐에 앉아 왼손으로 핸들을 가볍게 두드렸다.
“서찬아, 너랑 노을이 결혼한 지도 벌써 1년인데 어서 아이를 가져야지.”
핸드폰 너머로 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서찬은 답답함이 밀려왔지만 인내심 있게 다정하게 말했다.
“할머니, 우리 아직 젊어서 급할 거 없어요. 할머니는 지금 건강을 잘 챙기시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요. 그리고 할아버지도...”
“어떻게 급하지 않을 수 있어?”
할머니가 도서찬의 말을 가로챘다.
“네 할아버지가 지금은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우리 이제 나이가 많아서 언제 갑자기 죽을지 몰라.”
“할머니...”
할머니가 진지하게 말했다.
“쓸데없는 얘기 그만해. 밖에 떠도는 소문 나도 들었어. 노을이 괴롭혔다간 절대 가만 안 둬.”
도서찬이 아무 말이 없자 할머니가 다그쳤다.
“들었어?”
그는 그제야 미간을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알았어요, 할머니.”
간단한 안부를 몇 마디 더 주고받은 후 전화를 끊었다.
도서찬은 손가락으로 핸들을 툭툭 두드리면서 멀지 않은 곳의 가정 법원을 쳐다봤다. 그러고는 입술을 씹으면서 문자 목록을 열었다.
‘나의 사랑’이라고 저장된 어느 플로리스트의 프로필 사진을 지나 ‘황노을’의 대화창을 열었다.
마지막 문자가 오늘 아침에 이혼 절차를 밟기로 한 약속 시간과 장소였다.
황노을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어디야?]
그때 누군가 유리창을 두드렸다. 황노을이 약간 창백한 얼굴로 밖에 서 있었다.
그녀는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탄 다음 도서찬을 힐끗 쳐다봤다.
어제와 같은 옷차림이었는데 황노을이 신경 써서 골라준 옷이었다.
지난 몇 년간 황노을은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챙겨줬다. 향수, 넥타이, 그리고 맞춤 셔츠 등 그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도서찬의 질문에 황노을은 시선을 거두었다.
“안 늦었어요.”
황노을이 대답했다.
도서찬의 한마디를 애타게 기다리던 예전과 달리 이젠 말투도 덤덤해졌다.
도서찬이 저도 모르게 손을 멈칫하더니 얼굴을 찌푸린 채 그녀를 쳐다봤다.
어젯밤 그가 이혼 얘기를 꺼낸 뒤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안색이 조금 창백했다. 하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방금 할머니한테서 전화 왔어.”
도서찬이 시선을 거두고 말했다.
“우리 이혼하는 거 할머니께는 말씀드리지 말자. 연세가 많으셔서 이런 충격을 견디지 못하실 거야.”
황노을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할머니께서 뭐라 하시던가요?”
“빨리 아이를 가지라고 재촉하시지, 뭐.”
도서찬이 눈을 가늘게 떴다. 두 눈에 약간의 짜증이 스쳐 지나갔다.
이내 길고 긴 침묵이 이어졌고 몇 분 후 황노을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도서찬은 왼손을 꽉 움켜쥔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밖만 응시했다.
사실 그는 그의 아이가 어떤 모습일지, 언제 태어날지 상상한 적이 있었다. 황노을과 잠자리할 때 그녀의 배를 어루만지면서 귓가에 속삭이기도 했다.
“노을아, 언제 애를 낳아줄 거야?”
다만 아직 애가 생기지 않았다. 한연서에게 6개월밖에 남지 않았으니 6개월 뒤에 재혼해서 그때 가져도 늦지 않았다.
차 밖에 많은 사람이 오갔고 다시 3초 정도 흐른 후 황노을이 입을 열었다.
“서찬 씨,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을게요. 정말 나랑 이혼할 거예요?”
“마음이 바뀌었어?”
이번에는 정말로 화가 난 듯했다. 한연서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다시 한번 그의 확답을 들은 황노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류 하나를 꺼내 도서찬에게 건넸다.
도서찬이 얼굴을 찌푸리며 서류를 받았다. 확인해보니 재산 분할 합의서였다.
“그래도 이혼인데 깔끔하게 나눠야죠.”
황노을이 말을 이었다.
“도씨 가문의 재산에서 내 몫만 가져갈게요. 이혼 조정 기간 우리가 각자 번 돈은 각자 갖는 거로 하죠.”
그러고는 펜을 꺼내 옆에 놓았다.
“문제없으면 사인해요.”
그녀의 말투는 단호하기만 했다.
내용을 확인하던 도서찬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아주 간단명료한 합의서였다. 황노을은 정말로 많은 재산을 원하지 않았고 서명란에도 그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도서찬은 그녀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가짜 이혼인데 재산 분할 합의서까지 작성해야 해?’
어차피 한연서에게 남은 시간이 6개월밖에 없었다. 한연서와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나면 다시 예전처럼 황노을과 함께할 생각이었다.
도서찬은 그가 없이는 황노을이 살아갈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황노을은 자존심도 없었다. 전에 일부러 그녀에게 자아를 포기하게 하는 일을 시킨 적도 있었지만 그녀는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그 결과물을 들고 그의 앞에 서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서찬 씨, 봐요. 나 해냈어요. 잘했죠?”
황노을은 아주 순종적이었고 7년 동안 그 점을 수없이 확인했다.
만약 한연서가 없었더라면 도서찬의 결혼 생활은 아무런 흔들림이 없이 조용히 흘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한연서가 눈앞에서 피를 토하는 모습을 본 순간 도서찬은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도서찬이 옆 유리창을 힐끗 쳐다봤다. 유리창에 황노을의 무표정한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나한테 협박하려고 이러나? 전에 가짜 기록을 만들어서 연서를 모함한 적도 있었는데. 연서를 싫어해서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야. 허...’
펜을 집어 들어 그의 서명란에 서명했다.
‘아무도 날 협박하지 못해.’
서류는 총 두 부였고 황노을은 그녀의 것을 챙긴 다음 차에서 내렸다. 망설임 없이 번호표를 뽑아 자료를 제출한 후 이혼 신청서를 작성하고 각자 접수증을 챙겼다. 이혼 조정 기간이 지나면 다시 와서 마지막 절차만 마무리하면 될 것이다.
일련의 절차를 마친 두 사람은 가정 법원 밖으로 나왔다.
해가 하늘 높이 떠 있었고 따뜻한 햇살이 황노을의 몸에 쏟아졌다.
도서찬은 오가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혼하러 오는 사람들이었다.
그때 신혼부부로 돼 보이는 커플 한 쌍이 손을 잡고 지나갔다. 여자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다.
도서찬은 문득 1년 전 혼인신고를 할 때가 떠올랐다. 그때 황노을도 이렇게 행복하게 웃었다.
그의 시선이 황노을에게 향했는데 얼굴에 여전히 기쁨도 슬픔도 없었다.
도서찬이 말했다.
“이혼한 동안 돈은 계속 카드에 넣어줄게. 할아버지, 할머니께는 우리가 이혼한 사실을 말씀드리지 마.”
그러고는 황노을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휙 가버렸다.
황노을은 그의 차가 골목길을 돌아 사라질 때까지 쳐다봤다. 잠시 후 그녀가 부른 택시가 도착했다.
두 대의 차는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한 대는 비비안 플라워 스튜디오로, 다른 한 대는 A시 도산 병원으로 향했다.
도서찬이 플라워 스튜디오 문을 열자 한연서가 그를 보며 밝게 웃었다. 그는 접수증을 꺼내 한연서에게 보여줬다.
“이혼 신청 했어. 노을이가 생각보다 순순히 따르더라고.”
그 시각 황노을은 예약해둔 번호표를 들고 산부인과 진료실로 들어가 의사의 맞은편에 앉았다.
의사가 커튼을 쳤다.
“노을아, 이 아이 정말 지울 거야?”
의사이자 절친인 임지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너 계속 아이 갖고 싶어 했잖아. 전에 몸조리도 했었고.”
황노을이 접수증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차분하게 말했다.
“지울 거야. 이 아이 필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