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한연서가 탄 차가 도산 병원으로 향했다.
인터넷에 한연서가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이 폭발적으로 퍼져나가고 있었고 각종 댓글 창에도 의견이 분분했다.
[솔직히 한연서 씨 참 대단한 것 같아요. 사랑하면 사랑하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고. 당당하게 인정하는 모습 보기 좋아요.]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도서찬을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한연서의 마음은 한연서의 것이고 남의 가정에 끼어들지만 않으면 되죠, 뭐.”
[한연서 씨가 올린 영상이랑 전에 해그림원에서 했던 라이브 방송을 보면서 재벌의 세상이 어떤지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는데 이제 한연서 씨가 없으면 무슨 방법으로 보겠어요. 너무 아쉬워요.]
[도서찬 씨 아내가 누구예요? 좀 양보하면 안 되나? 한연서 씨 6개월밖에 안 남았다는데.]
[저 누군지 알아요. 황노을이라는 음악가인데 재벌가에 시집가고 나서 일을 그만뒀대요. 아주 팔자가 좋은 여자예요.]
...
도산 병원.
황노을의 핸드폰이 끊임없이 울렸다. 아는 사람들의 전화와 문자가 계속 쏟아졌는데 전부 한연서와 도서찬에 관한 걸 물었다. 어떤 사람은 안부를 물었고 어떤 사람은 떠보기도 했으며 또 어떤 사람은 비꼬기도 했다.
그녀는 한연서가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는 기사만 대충 보고 다른 건 보지 않았다.
어차피 상관없는 일이었으니까. 이혼 조정 기간이 지나면 황노을과 도서찬은 아무 관계도 아니게 될 것이다.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렀다. 시간을 확인하고 고개를 든 그때 마침 임지은이 가방을 들고 다가왔다.
“좀 어때? 어디 불편한 데 없어?”
임지은은 황노을의 안색이 좋지 않은 걸 보고 걱정스럽게 그녀를 부축했다.
황노을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결정을 내린 이상 그녀가 감당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임지은은 황노을의 속마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저 조용히 한숨만 내쉴 뿐 다른 말은 하지 않고 황노을을 부축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은 1층에 도착했다. 평소에도 병원에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붐볐고 황노을은 심지어 기자들까지 봤다.
“뭔 사람이 이렇게 많아? 게다가 기자도 왔어. 또 어느 연예인이 병원에 왔나 보네. 어쩜 매번 이런지 참...”
투덜거리던 임지은이 갑자기 뭔가 발견한 듯 표정이 급변하더니 황노을을 다른 쪽으로 끌고 가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황노을도 그들을 본 것이었다.
익숙한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잘생기고 키가 훤칠한 남자는 압도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렇게 복잡한 환경 속에서도 정성스럽게 다듬은 헤어스타일과 해외에서 맞춤 제작한 수제 양복은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리고 여자는 작고 여렸으며 안색이 몹시 창백했다. 보는 이의 동정심을 유발할 정도로 가련한 모습이었다.
걷다가 무엇에 걸려 비틀거리자 남자는 곧바로 그녀를 품에 안았다.
두 사람은 다름 아닌 도서찬과 한연서였다.
“보지 마, 보지 마.”
임지은이 화를 내며 욕설을 퍼부으면서 황노을의 시야를 가리려 했다.
“지은아, 가자.”
이미 도서찬과 헤어지기로 마음먹은 이상 황노을은 병원에 온 이유를 알리고 싶지 않았고 이 시점에서 그들과 우연히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다.
“가긴 어딜 가?”
임지은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두 사람 지금 이혼 조정 기간이야. 아직 이혼한 게 아니고 도서찬은 여전히 네 남편이라고. 그런데 공개적인 장소에서 다른 여자랑 저렇게 스킨십한다는 게 말이 돼? 이건 너무하잖아.”
‘남편...’
황노을이 시선을 거두었다.
과거 그녀도 ‘남편’이라는 호칭에 남몰래 기뻐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지은아, 나 몸이 좀 안 좋아. 얼른 가자.”
황노을이 화제를 돌렸다.
임지은은 바로 그녀의 상태를 걱정했고 더는 두 사람을 신경 쓰지 않았다.
황노을이 자리를 떠나던 그때 그쪽 무리에 있던 한연서가 황노을을 힐끗 쳐다봤다. 두 눈에 의기양양함이 스쳤다.
“서찬 오빠, 미안해. 나 때문에 오빠까지 사람들한테 둘러싸이게 하고.”
한연서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오빠가 언론에 노출되는 걸 싫어하는 거 알지만...”
“신경 쓰지 마. 일단 의사 선생님한테 가자.”
도서찬의 표정은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 조금 전 마음속에 뭔가 스쳐 지나간 듯했지만 그게 무엇인지 도서찬도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이 진료실로 들어갔다. 한연서가 병력을 의사에게 건네자 병력을 본 의사가 미간을 점점 더 찌푸렸다.
“지금 상태가 매우 심각합니다.”
의사의 말에 한연서는 애써 웃으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말을 이었다.
“선생님, 강력한 진통제를 처방해주시면 안 될까요?”
“현재 상태로는 입원 치료를 하는 게 좋습니다.”
의사가 병력을 보며 말했다.
“적극적으로 치료해서 최대한 생명을 연장해야죠.”
“괜찮습니다.”
한연서가 쓸쓸하게 웃더니 눈가에 살짝 고인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더는 치료받고 싶지 않아요.”
옆에 있던 도서찬이 그녀의 손을 꽉 잡았지만 그녀는 그저 고개만 내저었다.
“선생님, 전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좀 더 품위 있게 보내고 싶어요. 그러니 강력한 진통제만 처방해주세요.”
의사가 숨을 길게 내쉬더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문밖의 기자들이 이 모든 광경을 미친 듯이 촬영하고 생중계했다. 순식간에 온 세상이 떠들썩해졌다.
[세상에나. 한 사람의 목숨이 이렇게 끝나는 건가요?]
[저는 평소에 조금 부딪히기만 해도 아파서 눈물이 나는데 암 말기면 얼마나 아플지 상상도 안 가요. 그런데 한연서 씨는 계속 미소를 잃지 않네요. 정말 대단합니다.]
[치료받지 않겠다고 할 때 눈물이 막 나더라고요. 가족이나 자신이 중병에 걸린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이 순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렸고 한연서에 대한 동정심이 극에 달했다.
...
한연서는 빠르게 약을 받았다. 그들이 병원을 나섰을 때 황노을이 병원 밖 벤치에 앉아 차를 가지러 간 임지은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노을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눈썰미 좋은 파파라치들이 그녀를 발견하고 세 사람을 에워쌌다. 플래시가 끊임없이 터졌다.
도서찬도 황노을을 발견하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여기서 뭐 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서찬과 도서찬의 팔짱을 끼고 있는 한연서의 손을 번갈아 봤다.
황노을이 입을 열기도 전에 호사가들이 분위기를 부추기기 시작했다.
“황노을 씨, 혹시 인터넷의 기사를 보고 불륜 현장을 잡으러 일부러 오신 건가요?”
“남편이 다른 여자와 함께 공공장소에 출입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황노을 씨, 한연서 씨에게 뭐 하려는 건 아니죠?”
사람들은 황노을이 이곳에 나타난 이유가 일부러 기다리고 있다가 한연서와 경쟁하려는 것이라 생각했다. 도서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생각에 도서찬은 다시 혐오감이 샘솟았다.
“연서 아프다는 거 너도 알잖아.”
그의 목소리에 경고하는 듯한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황노을은 자신을 비웃었다. 그 말인즉슨 그녀가 한연서를 괴롭히려 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짓을 할 만큼 한가롭지 않았다.
“황노을!”
그녀가 한참 동안 아무 대답이 없자 기자들이 한연서에게 제삼자에 대한 생각을 묻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도서찬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황노을이 한연서를 위해 한마디 해주기를 바랐다. 예전처럼 도서찬의 명령이라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그러고 싶지 않았다. 도서찬마저 버리기로 했는데 왜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저도 모르게 오른손으로 아랫배를 감쌌다. 아랫배의 묵직한 통증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친구 만나러 왔어요.”
황노을은 마지막에 이 한마디밖에 하지 않았다.
이혼 조정 기간이라 임신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았고 또한 사람들이 그녀가 왜 병원에 있는지 왈가왈부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이 말은 도서찬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기도 했다.
말을 마친 황노을이 가려는데 기자들이 놓아주지 않았다. 계속 그녀를 밀며 몰아붙였다.
“황노을 씨, 많은 네티즌들이 도서찬 대표님과 한연서 씨가 함께하기를 바라서 황노을 씨더러 자리를 양보하라고 하는 걸 알고 계신가요?”
“한연서 씨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이 시기에 황노을 씨를 힘들게 할 건가요?”
“황노을 씨...”
황노을은 이 질문들에 답하고 싶지 않았고 그저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사람들은 세 사람이 함께 있는 걸 어쩌다가 봤기에 절대 순순히 보내려 하지 않았다.
바로 그때 도서찬이 황노을에게 신경도 쓰지 않는 걸 본 누군가가 황노을을 힘껏 밀쳤다.
발이 꼬여 휘청거리던 황노을은 본능적으로 배를 꽉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