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황노을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찰칵찰칵.
터져 나오는 플래시 세례와 함께 황노을의 초라한 모습이 고스란히 찍혔다.
황노을은 무의식적으로 도서찬을 쳐다봤지만 그의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아챈 황노을은 심장을 꿰뚫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는 황노을이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길 바랐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 마침 도서찬이 이곳에 있었고 아픈 사람을 동정하고 챙겨주는 건 남자로서 당연한 도리라고.
황노을은 배를 움켜쥐고 고개를 숙인 채 헛웃음을 지었다.
푸른 하늘에 뭉게구름이 천천히 흘러갔다. 사람들 틈새로 햇살이 부서져 내렸지만 황노을에게는 닿지 않는 듯했다.
황노을은 마음을 가라앉힌 후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도서찬을 등지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한연서 씨가 병에 걸린 건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뿐입니다.”
“두 분 친구 사이란 말씀입니까?”
눈치 없는 누군가가 물었다.
“친구?”
황노을이 피식 웃었다.
“아니요. 맨날 남편과 붙어 다니는 사람과 친구가 될 수는 없죠.”
차갑게 한마디를 내뱉고는 차를 몰고 온 임지은에게 손을 흔들었다.
“황노을!”
뒤에서 도서찬의 분노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녀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등을 돌린 채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임지은이 재빨리 와서 그녀를 데려갔고 떠나기 전 코웃음을 쳤다.
“누가 보면 도서찬 씨와 한연서 씨가 부부이고 우리 노을이가 내연녀인 줄 알겠어요. 인간이 어쩜 저렇게 뻔뻔할 수 있는지. 퉤!”
“이봐요!”
한연서가 화를 내며 한마디 하려 하자 임지은이 가로챘다.
“왜요? 내 말이 뭐 틀렸어요? 카메라로 내 얼굴 찍어서 사이버 폭력이라도 당하길 바라는 모양인데 마음대로 해요.”
그 말에 한연서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현장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임지은은 그 틈을 타 황노을을 차에 태운 다음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휙 가버렸다.
“걱정하지 마. 저건 딱 봐도 쇼야, 쇼. 나 이런 거 한두 번 보는 줄 알아? 딱 보면 알아, 이젠.”
임지은의 위로에 황노을은 달리 방법이 없다는 듯 웃었다.
“한연서가 아니라 네가 걱정돼서 그러지. 일에 영향이라도 주면 어떡해?”
마침 빨간불이라 임지은은 브레이크를 밟고 차를 세우고는 앞니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병원 원장이 우리 아빠인 거 잊었어?”
황노을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누구더라? 평생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했던 사람이?”
“필요할 땐 아쉬운 소리를 해야지. 이 세상의 대단한 사람들이 다 내 아빠였으면 좋겠어.”
두 사람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황노을이 괜찮다는 걸 확인하고는 파란불로 바뀌자마자 다시 출발했다.
“오후에 나 시간 비는데 부탁할 게 있으면 해.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줄게.”
임지은은 황노을에게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식으로 말했다. 황노을도 덩달아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마침 딱 부탁할 게 있었는데.”
“뭔데?”
임지은이 해맑게 물었다.
“이사 좀 도와줘.”
황노을이 임지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한 입으로 두말하기 없어.”
결국 임지은은 항복하고 말았다. 두 사람은 1년간 살았던 신혼집으로 이사센터를 불렀다.
그때 성급하게 결혼한 바람에 살림살이도 급하게 마련했다. 이 집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1년 동안 황노을의 정성으로 이곳은 제법 집다운 모습을 갖췄고 더 이상 차갑고 낯선 공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임지은이 이사센터 직원들을 지휘하는 동안 황노을은 한쪽에 놓인 샤넬 넘버 5 향수병을 집어 들었다.
결혼 후 도서찬이 해외 출장 갔다가 처음 사다 준 선물이었다. 언제 맡아도 질리지 않는 향이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출장 간 곳의 습기 냄새가 아직 몸에 배어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황노을에게로 달려왔다. 그날 포옹도, 키스도 다 너무 급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보통의 부부처럼 살고 있었다.
황노을은 뚜껑을 열고 향수를 뿌렸다. 여전히 익숙한 향이었다. 그해 도서찬이 그녀에게 향수를 뿌려주고는 가볍게 입을 맞췄을 때 맡았던 그 향처럼.
“이것도 가져갈 거야?”
임지은이 향수를 보고 이사센터 직원을 부르려 하자 황노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리고 도서찬이 사준 결혼반지도 빼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밖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잠깐 생각하다가 향수와 반지를 다시 서랍 안에 넣었다.
잠시 후 집을 모두 정리했다. 향수와 반지를 제외하고 그녀의 모든 물건을 전부 옮겼다.
이사가 번거로운 일이긴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의외로 금방 끝났다. 마음을 정리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차가 황노을의 새집으로 달려갔다. 창문을 스치는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넘겼고 백미러에 비친 집도 점점 멀어져 갔다.
과거를 버려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법이다. 그녀에게는 아직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많았다.
황씨 가문의 갑작스러운 몰락과 아버지의 ‘사고’에 대한 진실을 파헤쳐야 했다.
과거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았지만 이젠 그녀 자신만을 위해 살아갈 것이다.
그 시작은 음악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자금을 확보하는 동시에 아버지의 지인들에게 그녀를 보여줄 수 있었다.
황노을은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의 연락처를 찾아 문자를 보냈다.
[그 음악 예능 출연할게요.]
...
한편 한연서는 아직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도서찬이 그녀를 달래긴 했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조금 전 황노을이 떠나는 모습뿐이었다.
황노을은 자리에 서서 그와 등을 돌린 채 그런 말을 내뱉었다. 어떤 말을 해주기를 바라는지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다시 한번 도서찬의 뜻을 거슬렀다.
도서찬이 수많은 문자를 보냈지만 황노을은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 이번에도 이런 식이었다.
하루가 좀 넘는 사이에 황노을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일부러 그에게 시비를 걸었다. 이혼 접수증을 받을 때도 그랬고 병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도서찬의 눈앞에 어젯밤 황노을이 결정했냐고 묻던 순간 그를 빤히 쳐다보던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약간의 슬픔이 담겨 있었지만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문득 두려움이 밀려왔다.
“오빠, 노을 씨를 너무 탓하지 마.”
한연서가 울먹이며 말했다.
“노을 씨가 마음이 안 좋은 거 알아. 우리 둘이 병원에 있는 걸 보고 화가 나서 온 것도 다 이해해. 어쩔 수 없지. 내가...”
눈물이 더욱 세게 흘러내렸다.
“내가 빼앗은 건 사실이잖아... 마지막 6개월은 내가 두 사람의 결혼을 빼앗은 게 맞아. 그러니까 노을 씨가 나한테 어떤 상처를 주든 당연히 다 받아들여야지.”
말을 이어가던 그녀가 갑자기 기침하기 시작했다.
“콜록콜록...”
그러더니 피를 토해냈다.
“연서야!”
당황한 도서찬이 바로 구급차를 부르려 했다. 황노을이 갑자기 이상 행동을 보이는 건 그저 잠시 억지를 부리는 것이고 결국에는 그를 떠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연서가 고개를 내저으며 창백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말기라서 자주 이래. 걱정하지 마.”
그러고는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 침대에 누웠다.
도서찬이 얼굴을 찌푸린 채 황노을에게 따지러 가자 한연서는 태연하게 피를 닦고 미리 입에 물고 있던 혈액 팩을 뱉어냈다.
한연서가 간병인에게 웃으며 말했다.
“서찬 오빠가 황노을한테 뭐라고 할까요? 하하. 너무 기대돼요.”
그녀는 신난 얼굴로 영상에 달린 댓글을 보기 시작했다. 인터넷에 황노을을 비난하는 댓글로 도배됐다.
[한연서는 병원에 약을 처방받으러 간 거였어요. 게다가 치료 약도 아니고 그냥 진통제를 받으러 간 건데 황노을은 그것도 못 참고 가서 깽판을 치다니.]
[한연서 씨가 곧 죽는다는데 황노을은 그것도 못 참나?]
[아무튼 저는 한연서 씨랑 도 대표님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두 사람 같이 서 있으면 선남선녀가 따로 없다니까요?]
[황노을이 엉덩방아 찧던 모습이 어찌나 추하던지.]
[황노을, 빨리 물러나!]
[황노을, 빨리 이혼하라고.]
[이혼 +1.]
[이혼 +10086.]
...
한연서는 신나게 웃으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오늘처럼만 하면 돼요. 계속해서 화제를 만들고 인터넷에 뿌려서 황노을을 완전히 짓밟아 버려야 해요. 아, 그리고 오늘 황노을이 병원에 간 이유도 좀 알아봐 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