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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주민재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그가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 황노을을 부른 것도 이 점을 고려해서였다. 주민재는 그저 주씨 가문의 셋째지만 도서찬은 도경 그룹을 이끄는 대표였다.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라면 양측이 충돌하는 건 원치 않았다. 그런데 황노을이 이렇게 쉽게 동의할 줄은 정말 몰랐다. 황노을을 따로 불러 설득할 준비까지 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황노을을 주의 깊게 관찰하며 그녀의 속마음을 읽으려 했다. 그러나 모든 감정을 커다란 선글라스 뒤에 감춘 바람에 주민재는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절차대로 진행하죠.” 황노을은 두 사람이 앞에 있어 설명하지 않았다. 시선을 늘어뜨리고 주성 엔터테인먼트 사무실의 고급 원목 책상을 내려다봤다. 나이테가 겹겹이 새겨진 책상과 달리 그녀의 마음은 차분하기만 했다. “제 곡은 주성 엔터테인먼트에서 전적으로 관리하는 거라 회사 절차대로 진행하시면 됩니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주민재를 쳐다봤다. 주민재는 바로 이해하고 관련 직원을 불러 한연서와 절차를 진행하도록 했다. 황노을을 힐끗 보던 한연서의 두 눈에 경멸이 스쳐 지나갔다. “연이 씨는 결정을 참 독특하게 하시네요.” 한연서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투에 팔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결국 동의한 황노을을 비꼬는 듯한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황노을은 그저 웃기만 할 뿐 별다른 설명은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갔다. 복도를 지나 커피를 한 잔을 따르던 그때 주민재가 뒤따라왔다. “황노을.” 주민재의 부름에 황노을이 돌아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대표님.” 주민재의 표정이 복잡해지더니 잠깐 생각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이유가 뭐야?” 황노을은 웃으면서 주민재의 망설이는 두 눈을 쳐다봤다. “대표님도 들으셨잖아요. 한연서가 [신의 목소리]에 출연한다고.”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주민재는 그가 얻은 정보에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한연서가 참가자가 아니라 게스트로 출연한다고 하더라고. 옆에서 칭찬이나 하는 그런 심사위원 말이야.” 황노을의 미소가 더욱 짙어지더니 손에 든 커피를 옆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말이에요. 대표님은 기대되지 않나요?” 주민재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저랑 서찬 씨 이미 이혼 신청을 했어요. 이혼 조정 기간 4주일만 지나면 완전히 남남이에요.” 황노을이 주민재에게 설명했다. “저한테 이혼하자고 한 이유가 바로 한연서와 혼인신고를 하기 위해서예요. 아까 이 곡을 메인 곡으로 하겠다고 했잖아요. 언젠가는 모두가 이 곡이 제가 쓴 곡이라는 걸 알게 될 거예요. 아주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황노을은 비로소 깨달았다는 주민재의 얼굴을 보며 웃으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날 두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지금 아주 기대하고 있어요.” “두 사람한테 복수하려고 그런 거야?” 주민재의 질문에 황노을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옆에 있던 커피를 집어 들었다. 커피의 쓴맛이 입안에서 마음으로 퍼져나갔다. “아니요. 그냥 더는 그 사람들과 엮이지 않고 제 일에만 집중하고 싶을 뿐이에요.” 황노을은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리는 나무를 쳐다봤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강제로 사려 했고 스스로 제 발등을 찍으려 하잖아요. 그렇다면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요?” 주민재는 태연하게 얘기하는 황노을을 복잡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과거 황씨 가문은 A시에서 내로라하는 가문이었고 두 사람의 나이가 비슷하여 어릴 적부터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심지어 우정을 나눈 사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당시 A시를 떠들썩하게 했던 황씨 가문의 딸 황노을은 수많은 남자들의 첫사랑이었다. 하지만 황씨 가문이 하루아침에 몰락한 후에는 황노을을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항상 이렇게 현실적이었다. 만약 그때... 주민재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했고 황노을은 그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이혼하는 것도 나쁠 건 없지.” 약 3초간의 침묵 끝에 주민재가 입을 열었다. 황노을이 주민재를 보며 진심으로 말했다. “고마워요.” “서로한테도 더 좋고.” 주민재가 웃어 보였다. 이 말은 결코 틀린 것이 아니었다. 주씨 가문의 삼 형제는 결국 주안 그룹의 경영권을 놓고 경쟁해야 했다. 물론 가장 뛰어난 성과를 낸 자가 그 자리를 차지할 터. 몇 마디 더 얘기를 나눈 후 주민재는 황노을에게 그들이 현재 이혼 조정 중이라는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겠다고 약속한 다음 일하러 갔다. 이따가 [신의 목소리]에 대해서도 상의해야 했다. 황노을은 커피를 들고 홀로 자리에 서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을 바라봤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고 익숙한 모습이 황노을 앞에 나타났다. 도서찬인 걸 바로 알아채고 황급히 마스크를 쓴 다음 등을 돌렸다. “왜 그랬어요?” 황노을이 발걸음을 옮기기 전에 도서찬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침착하고 차분했으며 오랫동안 권력을 손에 쥐면서 쌓은 고귀함이 느껴졌다. 그의 익숙한 나무향 향수와 담배 냄새가 바람을 타고 풍겨왔다. 도서찬이 자주 쓰는 톰포드 오드 우드 향수였다. “연이 씨의 곡을 들으면 문학적 소양이 느껴져요. 참 재능 있는 사람인 것 같은데 왜 죽음을 앞둔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 겁니까?” 도서찬의 말에 황노을은 되레 서글퍼졌다. 천천히 몸을 돌려 그녀를 쳐다보는 도서찬을 올려다봤다. “저...” 황노을은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재능이 있나요?” 도서찬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네.” 객관적인 사실이라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황노을은 피식 웃기만 했다. ‘재능?’ 머릿속에 1년 전 그들의 결혼식 날 밤이 생각났다. 그때 신혼집에서 도서찬은 담배를 피우며 이렇게 말했었다. “황노을, 할아버지 상태가 좋지 않으셔서 너무 걱정돼.” 그날 그가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했다. “자잘한 작곡이나 작사하는 건 잠시 미뤄두고 나 대신 할아버지, 할머니를 잘 보살펴줘.” 구불구불 피어오르는 연기가 도서찬의 태도를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참으로 가볍기 그지없었다. 그때 황노을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돌보면서 음악 활동을 병행할 수 있다고 했었다. 그런데 도서찬이 싫은 티를 팍팍 냈다. “황노을, 우리 가문에 시집온 이상 얼굴을 드러내는 일을 할 필요 없어.” 결국 그녀는 그의 뜻을 따랐다. 도휘명의 상태가 정말 좋지 않아 특히 더 돌봐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이 정말 말 그대로 얼굴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는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그녀의 일을, 그녀의 재능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일까? 이것에 대해 황노을에게 설명해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두 사람이 가장 친밀한 스킨십을 한 부부임에도 불구하고. 도서찬은 눈앞의 여자를 쳐다봤다. 왠지 모르게 어디서 본 적이 있는 듯한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까지 내려오는 머리, 감각적이면서도 품위 있는 옷차림, 그리고 다리 라인을 아름답게 부각시키는 적절한 높이의 하이힐을 보고 있자니 또 처음 보는 사람인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짜증이 났다. 눈앞의 이 여자가 황노을과 닮았다는 생각이 저도 모르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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