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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도서찬도 함께 왔을 줄은 몰랐다. “나인 걸 그 사람들이 아나요?” 황노을이 물었다. 연이가 바로 황노을이라는 걸 한연서가 아냐고 자세하게 묻지 않아도 주민재가 그녀의 뜻을 이해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몰라.” 주민재가 바로 대답했다. “이건 내가 확신할 수 있어.” 황노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옆으로 차들이 쉴 새 없이 지나갔다. 그녀는 천천히 움직이는 구름을 올려다보다가 결정을 내렸다. 먼저 의사에게 전화를 걸어 예약 시간을 오후로 변경할 수 있는지 확인했다. 그러고 나서 주민재에게 지금 바로 가겠다고 알렸다. “알았어. 최대한 빨리 와.” 황노을은 전화를 끊고 차를 돌렸다. 먼저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한 후 주성 엔터테인먼트로 급히 달려갔다. 그리고 차를 주차한 다음 모자와 선글라스, 마스크를 착용하고서야 주성 엔터테인먼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황노을은 디올 토슈즈를 신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연아, 왔어?” 주민재가 가장 먼저 황노을을 발견했다. 그녀의 새로운 옷차림을 보고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긴 테이블 반대편 좌석으로 안내했다. 테이블 맞은편에 도서찬과 한연서가 앉아 있었다. 그녀가 들어오자 한연서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이 씨, 안녕하세요. 저는 한연서라고 해요. 제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병약한 미소를 짓는 한연서의 모습이 참으로 가련해 보였다. “연이 씨 곡을 진심으로 사고 싶어서 그래요. 부디 저한테 파셨으면 좋겠어요.” 황노을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도서찬을 힐끗 쳐다봤다. 도서찬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모든 관심이 오로지 한연서에게 쏠려 있었다. 황노을의 옆에 앉은 주민재가 한연서의 말을 듣고 먼저 입을 열었다. “한연서 씨,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연이는 이 곡을 팔 생각이 없어요.” 주민재가 말했다. 하지만 한연서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눈시울이 붉어진 채 황노을을 쳐다봤다. “연이 씨, 제가 연이 씨 곡이 정말 마음에 들어서 그래요.” 그러고는 엄청난 고통이라도 참는 것처럼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 옆에 있던 도서찬이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한연서는 ‘꿋꿋하게’ 고개를 젓고는 계속 황노을에게 말했다. “연이 씨, 앞으로 저한테 남은 시간이 6개월밖에 없어요. 그러니 제발 저한테 팔아주세요. 제 마지막 소원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 말에 황노을이 피식 웃었다. 또 ‘마지막 소원’이라는 말을 들먹였다. 도서찬이 이혼을 요구했을 때도 한연서의 마지막 소원이 도서찬과 혼인신고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제 마지막 소원이 하나 더 늘어난 셈이었다. 황노을은 아픈 사람을 존중했고 타인의 생명도 존중했다. 하지만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사람은 황노을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결혼 생활을 파탄 낸 사람을 존중하고 싶지 않았다. 황노을이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지 않았다고 뭐든 다 양보해야 하는 걸까? “만약 제가 거절하면요?” 쉰 목소리로 말하는 황노을의 한마디에 한연서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한연서 씨에 대해 저도 들은 바가 있습니다.” 황노을이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유명 플로리스트 한연서 씨가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는 기사가 요즘 인터넷에 도배됐더라고요. 그런데 곡을 팔든 말든 이건 제 마음이에요. 전 한연서 씨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줄 의무가 없어요. 그리고 그 곡을 가지고 뭘 하시려는 건지도 모르겠고요.” 그녀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3초 후에 다시 말을 이었다. “라이브 방송할 때 배경 음악으로 깔 생각이신가요? 아니면 장례식 행진곡으로 쓰려는 건가요?” “당신!” 한연서가 버럭 화를 내더니 이내 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다. 도서찬은 한연서의 등을 두드리는 동시에 불쾌한 표정으로 황노을을 노려봤다. 그녀가 들어온 지 한참이 지났는데 그녀에게 눈길을 준 게 처음이었다. “연이 씨, 말씀이 너무 지나치신 거 아닌가요?” 도서찬이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 칠흑처럼 어두운 두 눈이 날카롭기 그지없었고 익숙한 얼굴에 황노을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다. 황노을은 그런 도서찬을 살펴봤다. 어제와는 다른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별장 옷장에서 그녀가 전에 골라줬던 옷 중 하나일 것이다. 별장에 갔으니 황노을이 이사했다는 사실도 알았을 텐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차라리 잘됐어.’ 정신을 가다듬은 황노을은 도서찬의 시선을 마주하지 않고 시선을 늘어뜨렸다. “저는 강제로 팔라고 하는 게 더 지나치다고 생각하는데요? 강제로 팔라고 했으면 상대가 안 좋은 소리를 해도 기꺼이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죠.” 도서찬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고 표정이 아주 불쾌해 보였다. “오빠, 내가 말할게.” 도서찬이 다시 입을 열기 전에 한연서가 사려 깊은 척 나섰다. 사무실의 은은한 조명 아래 한연서가 입은 흰색 셀린느 정장이 그녀를 더욱 창백하게 보이게 했다. “연이 씨, 저 정말 이 곡이 마음에 들어요.” 그러고는 도서찬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이 곡이 제게 큰 감동을 줬거든요. 이 사람을 사랑하면서 생겼던 고민들, 열정, 열등감까지 이 곡에 담겨 있어요. 그리고 사랑에 대한 헌신, 거기서 오는 기쁨, 그리고...” 한연서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깊은 절망까지 느꼈고요. 정말 뼛속까지 사무치는 절망감이었어요. 연이 씨, 이 절망감이 저를 괴롭혔고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게 만들었어요. 하지만 이 곡에서 저한테 가장 큰 감동을 준 건 마지막에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는 부분이에요. 들을 때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남은 날을 평온하게 보내는 지금의 제가 생각나더라고요.” 한연서의 목소리가 때로는 살짝 떨렸고 때로는 호탕하게 들렸다. 마치 수많은 풍파를 겪은 사람처럼 보여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옆에 앉은 도서찬 역시 그녀의 말에 공감하는 듯했다. 황노을은 한연서가 절망적인 마음을 얘기할 때 도서찬의 눈빛에 깃든 연민을 보았다. 그건 그녀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황노을의 7년은 한연서가 그의 곁에 있던 1년도 채 안 되는 시간보다 못했다. 그녀는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봤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함께 겪고 있는 애틋한 연인처럼 보였다. 하지만 진짜 아내는 황노을이었기에 전혀 감동받지 못했고 그저 눈꼴 사나울 뿐이었다. “연이 씨, 이 곡은 제가 최근에 겪은 것들을 완벽하게 담아내고 있어요. 그래서 연이 씨가 이 곡을 어떤 마음으로 썼을지 누구보다 잘 이해할 거라고 생각해요. 연이 씨도 연이 씨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이 이 곡을 사가기를 바라는 거 아닌가요?” 한연서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 황노을이 무조건 곡을 팔 거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곡을 팔 건데 곡을 이해하는 사람에게 파는 게 최선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황노을은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왜냐하면 이 곡은 그녀가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사람을 사랑해서 배신을 겪은 내용을 담은 곡이기 때문이었다. 황노을이 도서찬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와 결혼하여 더없이 행복했으나 나중에 그의 외도를 알았을 땐 절망적이었고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그 시간을 버틴 후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한연서가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로 그녀를 설득하려 했지만 사실 그 감동은 이 곡의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보다 더 가소로운 일이 있을까? 황노을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도서찬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쳐다봤다. “연이 씨, 이 곡을 연서가 봤다는 건 연이 씨도 팔 의향이 있었다는 뜻이 아닌가요?”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냉정하고 차분했다. 평소 계약을 처리하는 것처럼 단번에 핵심을 콕 찔렀다. “그런데 지금 판매를 거부하는 이유는 구매자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가격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겠죠.” 도서찬이 황노을의 두 눈을 빤히 쳐다봤다. 하지만 검은 선글라스밖에 보이지 않았다. “유명 음악가의 곡 값이 수억 원이고 연예인의 저작권 수익도 1년에 수십억 원에 달하죠. 20억 드릴게요.” 도서찬이 말을 이었다. “이 금액이라면 연이 씨도 만족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황노을은 그저 웃기만 했다. 20억 원이면 정말 그녀를 높이 평가한 것이었다. 현재 ‘연’은 거의 무명에 가까운 음악가라 수천만 원도 매우 후한 가격이었다. 도서찬이 20억 원을 제시한 건 오로지 한연서를 위해서였다. 황노을은 너무 우스워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그 모습에 한연서는 당황했다가 점점 화가 치밀었다. “연이 씨, 20억 원이면 아주 높은 가격이에요. 요즘 [신의 목소리]라는 음악 예능이 있는데 연이 씨도 알고 있죠? 이 곡을 메인 곡으로 해서 그 프로그램에 출연하려고요. 제 생각에...” 한연서가 계속 말을 하려는데 옆에 있던 주민재가 더는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내리쳤다. “팔지 않겠다잖아요. 도서찬 씨, 적당히 하세요.” 도서찬은 자리에 앉아 주민재를 차갑게 노려봤다. 앉아 있는데도 주민재를 압도하는 분위기를 풍겼다. 황노을이 눈가의 눈물을 닦아내고는 옆에 있던 주민재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팔게요.” 황노을이 말했다. [신의 목소리]가 바로 황노을이 출연하기로 한 그 음악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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