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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다시 눈을 뜬 백하임은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침대 머리맡에는 해장국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한 번 힐끗 보기만 해도 그게 고선호가 직접 끓인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예전에도 그랬다. 그는 백하임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이는 걸 좋아했다. 그녀가 위도 약하고 입맛도 까다로운 탓에 자신이 직접 해줘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며 밥을 조금이라도 더 먹게 하려고 재료를 예쁘게 조각해 만들곤 했다. 딱 지금처럼. 해장국에는 꽃 모양으로 깎인 무 한 송이가 국물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백하임은 몸을 일으켜 백여진의 병상으로 향했고 그제야 그녀는 이미 깨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병실 한쪽 식탁에는 색색의 음식들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보아하니 백하임에게 놓인 해장국은 그저 겉치레인 것 같았다. 한편, 고선호는 그릇을 들고 백여진에게 한 숟가락씩 떠먹이고 있었다. “우리 여진이 착하지? 조금만 더 먹어봐. 이거 내가 얼마나 예쁘게 만든 줄 알아? 정말 공들였단 말이야.” 그 말에 백하임은 발걸음을 뚝 멈추고 즉시 뒤돌아섰다. 며칠 동안, 그녀는 직접 눈으로 봐왔다. 고선호가 백여진을 얼마나 세심하게 챙기는지. 체온계를 따뜻하게 데워서 붙여주고 약은 먼저 자신이 맛을 보고 쓴맛이 없을 때만 먹였으며 백여진이 잠들기 전까지는 절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이 모든 걸 그녀는 낯설어하지 않았다. 고선호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떤 모습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실제로 그 장면을 보니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얼마 후, 고선호가 병원에서 급히 회의를 나간 사이 백여진이 백하임 앞에 나타났다. “언니. 내가 뭐라고 했어? 난 언니가 선호의 마음속에서 완전히 없어지길 바랐어. 그런데 왜 아직도 옆에 붙어 있는 거야? 왜 선호가 언니를 술자리에 데려간 건데? 친구들에게 소개라도 하고 싶었던 거야? 왜 난 데려가지 않았을까? 언니는 진짜... 내가 죽는 꼴이라도 보고 싶어?” 그 말에 찬물이 머리 위에서 그대로 쏟아진 듯 백하임은 몸서리쳤다. “여진아. 네가 원하는 건 뭐든 할게. 떠나려면 떠날게. 그러니까 제발 더는 널 다치게 하지 마.” 백여진은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그럼 이거 마셔.” 그녀는 동생이 내미는 병을 왼손으로 받았고 차갑고 매끄러운 감촉에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이건 독약일까?’ 백하임이 잠시 머뭇거리자 백여진이 약병을 홱 빼앗아 들었다. 그러고는 억지로 그녀의 입에 부어버리더니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 지었다. “언니. 재미있게 놀아.” 그녀는 순식간에 뒤로 물러나 문을 밖에서 잠가버렸다. 곧 머리끝에서부터 알 수 없는 열기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백하임은 저도 모르게 옷을 벗어 던지고 싶어졌다. 가장 끔찍한 건 남자를 원한다는 감각이었다. 그제야 백여진의 의도가 선명하게 이해됐다. 정신이 흐려질 때쯤, 문이 벌컥 열리고 키 큰 남자가 들어왔다. 백하임은 혀를 깨물어 피비린내로 정신을 다잡고 구석으로 향해 몸을 만 채로 덜덜 떨었다. 남자가 다가올수록 그녀의 이성은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본능은 스스로 블라우스 단추를 풀게 했지만 바로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백하임, 꼴이 아주 처참하네.” 그 목소리가 귓가에 닿는 순간 백하임은 반사적으로 옷깃을 꽉 움켜쥐었다. ‘절대 안 돼. 옷을 벗을 수 없어. 선호한테 내 의수를 보여줄 수는 없어.’ “오지 마!” 그 한마디가 그를 자극한 걸까, 고선호는 그녀를 번쩍 들어 침대에 내팽개쳤다. 이윽고 차갑고 무거운 기운이 백하임을 덮쳤고 숨조차 쉬기 힘들어졌다. 그는 분노에 찬 얼굴로 그녀의 목을 움켜쥐더니 낮은 목소리로 따지듯 물었다. “너는 내가 그렇게 싫어? 약에 취한 상태에서도 날 만지는 건 그렇게도 싫어?” 백하임은 말하는 그의 입술을 주시했다. 뜨거운 숨결이 가까워졌다. 입술이 닿기 직전 그녀는 머리맡의 과도를 움켜쥐어 자신의 허벅지를 그대로 찔렀다. 극심한 통증은 백하임으로 하여금 정신을 차리게 했다. 잠시 후,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억지로 차분한 척하며 입을 열었다. “고 대표님, 가격 얘기도 아직 안 끝났는데? 그래도 옛정이 있으니까 할인이라도 해줄게. 한 번에 200만 원은 어때?” 고선호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젠장.” 방금 전까지 이글거리던 그의 눈빛은 한순간에 얼어붙었고 고선호는 백하임을 침대에서 거칠게 밀어냈다. “넌 정말 스스로를 처참하게 짓밟고 다니는구나.” 얼음물 한 양동이가 그대로 머리 위에 쏟아진 듯 몸속을 휘감던 열기가 식어갔다. 백하임은 무표정하게 분노로 숨이 거칠어진 고선호를 바라봤다. “의사 좀 불러줘. 위쪽은 멀쩡하니까 벗길 필요 없어. 나도 아직은 몸을 팔아야 하니까.” “백하임!” 고선호는 이를 갈았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씩씩대며 병실을 나섰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백하임은 그제야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괜찮아. 아직 6일 남았어.’ 그녀는 여기서 끝낼 수는 없다고 조용히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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