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며칠 동안 고선호는 일부러 백하임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집사 말로는 그는 백여진을 데리고 휴가를 갔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SNS에는 백여진이 올린 사진이 끝도 없이 올라왔다.
바다에서 함께 잠수를 하고 고공에서 뛰어내리기도 하며 레이싱카를 타는 사진.
백하임의 심장이 쿵 내려앉는 순간마다 고선호는 백여진의 손을 꽉 잡고 말했다.
“난 널 사랑해. 너만 사랑해.”
백하임은 화면을 터치하듯 쓰다듬다가 조용히 눈물을 떨궜다.
그날 새벽, 새벽 세 시.
백하임의 휴대폰이 한 번 진동했다.
[백하임, 너는 왜 여진이가 올린 SNS는 보고 나한테는 한마디도 안 해?]
잠시 뒤, 또 메시지가 왔다.
[난 여진이를 사랑해. 넌 질투도 안 나? 백하임, 난 너한테 뭐야? 아무 데나 버려도 되는 개야? 나 돈 많아. 그러니까 넌 나를 사랑해도 돼.]
그녀가 계속 답장이 없자 상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문자를 전송했다.
[네가 후회한다 했잖아. 다시는 날 버리지 않겠다 했잖아. 난 그 말만 다시 듣고 싶어.]
그러나 메시지들은 곧바로 전부 삭제되었고 대신 마지막에 딱 하나만 남았다.
[앞으로 난 백여진 한 사람만 사랑할 거야.]
그때, 방문 밖에서 집사가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표님 또 취하셨어요? 이러다 몸 망가지는 거 아닌지 걱정됩니다. 해장국 준비하세요. 그리고 여진 씨한테 말리라고 전하시고요. 그래도 여진 씨 말은 잘 듣잖아요.”
고선호는 매일 술로 자신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백하임의 가슴이 눌린 듯 답답했다.
그녀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답장을 썼다가 바로 지웠다.
처음엔 술 그만 마시라는 잔소리라도 하고 싶었지만 다시 다른 문장으로 바꿨다.
[돈 더 줘. 그럼 개 한 마리 더 키워줄 수도 있지.]
그날 밤, 백하임은 뜬 눈으로 날이 밝는 걸 지켜봐야 했다.
둘의 지난날들이 파도처럼 몰아쳤다.
백하임은 고선호가 술 마시는 걸 싫어했다.
그가 술 냄새만 풍겨도 일부러 미간을 찌푸렸기에 고선호는 술자리가 있어도 알람 맞춰두고는 약속 시간 되면 꼭 빠져나오곤 했다.
그게 반복되자 사람들은 아내의 눈치만 본다며 놀렸지만 고선호는 오히려 뿌듯하다는 듯 웃었다.
“내 와이프가 간섭해 주는 거 좋지. 너희들은 부러워도 못 하잖아.”
그러나 백하임이 떠난 3년의 공백 동안, 고선호는 술로 몸을 망가뜨렸고 그녀는 더 이상 화낼 권리조차 없었다.
날이 막 밝았을 무렵, 백여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 선호 급성 백혈병이 재발했대!”
그 말에 백하임은 멍해졌다.
무리한 익스트림 스포츠, 과도한 음주, 그 모든 게 한순간에 이해되었다.
그녀는 지금이라도 당장 뛰어가 고선호를 붙잡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왜 이렇게 네 몸을 막 대하는 거야? 내가 널 살리려고 3년 동안 얼마나 고생했는데!”
하지만 지금, 차에 앉은 그녀의 입에서는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더 빨리 흘러가기를, 그것만을 바랄 뿐이었다.
“상태가 매우 위중합니다. 일단은 응급조치를 하겠지만 최선은 두 번째 이식입니다. 전에 이식한 기증자를 찾는 게 우선입니다.”
백하임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때, 백여진이 먼저 나섰다.
“저예요. 제가 다시 기증할게요.”
맞다.
서류상 기증자는 백여진이었다.
‘내가 그걸 잠시 잊고 있었네.’
곧, 사람들 사이 틈으로 백하임은 병상 위에 있는 고선호의 모습을 보았다.
단 3일 만에 그는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눈물이 차오르는 걸 애써 억누른 그녀는 다시 의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두 번째 수술의 위험성은 굉장히 큽니다. 현재 병원엔 이걸 할 수 있는 의사가 없어요. 예전에야 가능했지만 백씨 가문의 명의가 살아 계셨다면 문제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백씨 가문의 그 천재 딸에 관한 얘기는 들으셨죠? 지금 행방불명이라던데...”
그 말에 백여진의 날카로운 시선은 백하임에게 향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자신이 숨기고 있는 오른팔, 의수를 뒤로 감췄다.
전쟁터에서는 그것으로 사람을 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섬세한 수술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환자는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하고 싶어도 해낼 수 없다.
만약 억지로 수술대에 오른다면 실패 확률은 100퍼센트였다.
그런데 눈치 없는 백여진이 이런 말을 내뱉었다.
“의사 선생님, 바로 여기 있어요. 백씨 가문의 딸, 백하임 여기 있다고요. 지금 당장 수술할 수 있어요.”
순간, 의사의 눈이 번쩍 빛났고 병실 안의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안 돼. 절대 안 돼.’
이윽고 어지럼증이 밀려온 백하임은 떨리는 입술로 가장 잔혹한 말을 내뱉었다.
“그 수술 저는 못 합니다.”
그 말에 침대 위에 누워있던 고선호가 눈을 번쩍 뜨더니 눈물 한 방울을 뚝 떨궜다.
“백하임, 너 또 날 버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