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저녁 시간.
박아윤은 양반다리로 의자에 앉아 웃음을 머금고 돈을 세었다.
나머지 가족들은 나란히 머리를 겹치고서 부엌 문틈 사이로 거실을 엿보고 있었다.
“아윤이 정말 잘하지?”
박창진은 무척이나 흐뭇해했다.
“내 동생답군. 천재적인 두뇌를 완벽하게 물려받았잖아.”
“야, 박서준, 네가 천재라면 이 세상에 바보는 없어.”
박동하가 가차 없이 쏘아붙였다.
유선영은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그래도 기뻐하며 말했다.
“적어도 지효처럼 돈만 밝히는 애는 아니잖아. 아윤이는 착한 아이야!”
박유하는 휠체어에 앉아 가장 구석에서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먼 고양이가 죽은 쥐를 잡은 격이네.”
“누가 눈먼 고양이라는 거야?”
유선영이 되물었다. 왠지 자신을 욕하는 것처럼 들렸으니까.
박유하는 말문이 턱 막혔다.
“엄마, 아빠, 오빠들! 와서 돈 나눠 가져요.”
몇몇 사람들은 행여나 박아윤에게 들킬까 봐 부엌에 숨어 귓속말을 나눴다.
이때 박아윤이 기쁜 마음으로 돈을 다 나누고 큰소리로 외쳤다. 뭇사람들은 화들짝 놀랐다.
“오늘 총 350인분을 팔았어요! 개당 순이익 2천 원이고 총 70만 원이에요! 오후에 서준 오빠가 복근 보여주고 사진 촬영까지 50장 해서 100만 원 벌었고요, 저는 경락마사지로 5회에 10만 원 벌었어요. 그래서 오늘 총 매출은 180만 원이랍니다!”
박아윤을 제외한 가족들 모두가 똑같은 생각이었다.
‘서민들은 온 가족이 하루 동안 힘들게 일해도 고작 180만 원밖에 못 버는구나...’
박정우는 그때 박아윤에게 2억 원을 그냥 남겨두라고 권하지 않은 것을 더욱 후회했다. 비록 적은 액수일지라도 최소한 동생이 이렇게 고생할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
박아윤은 그들을 쭉 둘러보았는데 다들 복잡한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결국 가난에 익숙해져서 하루에 거의 200만 원을 버니 다들 적잖게 놀란 듯싶었다.
“다들 걱정 마세요. 제가 있으니 우리 가족 조만간 백만장자가 될 거예요. 시작이 절반이라고 우리 계속 화이팅해요.”
“백만장자?”
박서준은 웃음을 터뜨렸다.
박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만 해도 저절로 웃음이 나오고 그러죠?”
박서준은 침묵했다. 그는 단지 어이가 없었다. 고작 백만장자에 만족할 리가 있을까? 평소에 그가 대충 착용하는 액세서리만 해도 수억은 될 테고 고급 맞춤 의상은 몇백억을 넘나들 텐데.
백만장자가 부자의 종착점이라면 이들 박씨 가문은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까?
단순한 동생을 바라보며 박서준은 고개를 내저었다. 불쌍한 동생 아윤이가 아직도 그들에게 깜빡 속은 채 180만 원을 벌었다고 이렇게 기뻐할 줄이야.
“에헴, 서준이 너 피곤하다며? 먼저 가서 씻어.”
박정우는 동생들의 성격을 너무 잘 알았다. 박서준이 더 오래 있으면 뭔가 들통날 게 뻔했다.
이때 박아윤이 박서준을 잡아당겼다.
“아니요, 잠깐만요. 일단 돈부터 나눠야죠. 우리 각자 20만 원씩 나눠 가지고 나머지 40만 원은 자본금으로 해놔요. 이제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수익을 배당해 드릴게요. 어때요, 제 아이디어?”
“아주 좋아.”
모두가 동의했다.
박아윤이 잠들기 전에 박창진이 그녀의 방문을 노크했다.
“네, 아빠.”
박아윤은 몸에 맞지 않는 잠옷을 입고 문 앞에 서 있었다.
한편 박창진은 잠시 어색해하며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아윤아, 나...”
박아윤은 동그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
“내일 아침에 너랑 같이 약초 따러 갈게.”
박창진은 가장 어린 딸에게 이렇게 큰 부담을 주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박창진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마도 딸이 자신을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았다.
“약초는 일단 반 달 정도 쓸 수 있어요. 내일 아침에는 저 대신 식자재를 준비해 주세요. 오늘 몰래 봤더니 다들 아빠가 만든 음식을 좋아하더라고요.”
박아윤은 머리를 갸웃하며 웃었다.
“저도 좋아하고요.”
박창진은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져서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며 말했다.
“아윤아, 이건 꼭 받아야 해. 나중에 식자재 사러 갈 때 돈이 필요할 테니 여기 적금으로 쓰거라.”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카드를 봤는데 이건 무려 슈프림 블랙카드였다.
“...”
지난번 카드와 아주 흡사한 카드, 박창진은 대체 어디서 이런 이상한 카드들을 구해오는 걸까.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카드를 받았다.
“네, 고마워요 아빠.”
[지효 한 번만 더 괴롭히면 그땐 진짜 가만 안 둬.]
박아윤이 방으로 돌아오자 휴대폰 화면이 켜진 상태였다. 김하정한테서 문자가 한 통 도착했는데 전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참에 김하정을 차단해 버렸다.
“지효야, 여기가 바로 전에 말한 타투 가게야. 네 요구대로 똑같이 복원해줄 수 있을 거야.”
임지효는 깊은 밤, 가족들이 다 잠든 후에 친구와 약속을 잡고 몰래 집에서 나왔다.
친구는 그녀가 준 샤넬 가방을 애지중지하며 말했다.
“그냥 가게 하나 추천해준 것뿐인데 뭘 이런 것까지 다.”
“너 가져. 그리고 저기 문 앞에서 나 기다리면 돼.”
임지효는 아양을 떠는 친구를 보며 통쾌함을 느꼈다.
역시 돈이 있으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었다.
그녀는 마스크를 쓰고 타투 가게에 들어서서 다짜고짜 2백만 원을 내던졌다.
“여기 사장님 어디 있어요?”
“네, 손님. 문신하러 오셨어요?”
사장은 주저 없이 2백만 원을 받아들었다.
“제가 확실하게 해드릴게요.”
임지효는 사장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는데 아티스트 기운이 물씬 풍기는 청년이었다. 그녀는 사진을 한 장 꺼내며 사장에게 말했다.
“여기 이곳에 흉터를 새기고 싶어요. 똑같이요.”
사장은 사진을 들고 자세히 관찰했다.
‘이 여자가 미쳤나? 오밤중에 흉터나 문신해달라고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그런데 사진 속 여자는 확실히 예쁘네. 설마 따라 하려는 건가? 왜 굳이 흉터를...’
“이건 관절 부위라 작업하기가 좀...”
사장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에 임지효가 짜증을 냈다.
“말해봐요, 얼마면 되겠어요? 똑같이 복원해준다면 돈은 얼마든 드릴게요.”
“정말요?”
사장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오늘 돈 많은 호구 한 명 제대로 만난 셈이다.
“2천만 원만 주세요. 예쁜 아가씨라 할인 가격으로 해주는 거예요.”
이전 같았으면 임지효는 이런 상황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박씨 가문이 찢어질 듯 가난하니 2천만 원을 모으자면 얼마나 오랫동안 근검절약해야 얻을 수 있는 금액일까?
“이제 시작하시죠.”
임지효는 사장이 너무 수다스럽게 느껴졌다.
“만약 조금이라도 다르면 가게 문 닫을 각오 해요!”
임씨 가문은 강씨 가문처럼 부유하진 않지만 이처럼 작은 타투 가게는 쉽게 다룰 수 있었다.
사장은 중2병 같은 그녀의 멘트에 어이가 없었지만 겉으론 계속 아양을 떨었다.
“걱정 마세요. 무조건 똑같이 해드릴 겁니다! 여기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발 조심하시고요.”
임지효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박아윤만 생각하면 마음속에서 분노가 치솟았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 속으로 맹세했다.
‘잘 들어, 박아윤. 민건 오빠 와이프는 나야. 꼭 나여야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