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다음 날 아침, 아침 식사 시간이 지나도록 박아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박동하는 계속 시계를 쳐다보며 최신 실험 결과를 확인하러 가야 한다고 재촉했다. 그는 수시로 계단 입구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뭐랬어. 이틀을 못 간다니까. 다들 그렇게 안 믿더니. 임씨 일가에서 호강하던 일상에 익숙해졌으니 겨우 이틀 만에 본색을 드러낸 거야.”
끼익.
이때 마당 문이 열렸다.
박아윤은 묶음 머리를 하고 린넨 소재의 긴 팔을 입고서 오늘도 어김없이 낡은 가방을 메고는 숨을 헐떡였다. 맑고 투명한 땀방울이 하얀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마당 문 앞에 서서 말했다.
“다들 일어났네요.”
“헐, 완전 무겁잖아. 이거 다 뭐야? 30킬로는 되겠다.”
박서준이 토스트를 내려놓고 재빨리 달려가 그녀 대신 가방을 들어주려다가 무게에 짓눌려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박아윤은 안 웃을 때 항상 차가운 이미지였지만 입만 열면 눈웃음이 묻어나고 사람 마음을 녹이며 저도 몰래 가까이 다가가고 싶게 만들었다.
“우리 집 근처의 저 산이 정말 보물 같아요. 온갖 약초가 가득하니 아침 일찍 가서 따왔어요. 오빠가 대표님이랑 협력할 수 있다고 해서 대체품으로 구해왔어요. 오늘 바로 가져갈 수 있도록 금방 만들게요.”
박정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식탁에서 일어섰다. 그는 또 박아윤을 힘들게 했다는 생각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다리 상처 때문에 좀 쉬라고 했잖아. 왜 자꾸 무리하게 움직이는 건데?”
츤데레 같은 박동하가 어느새 약상자를 꺼내 들고 원래 싸매놓았던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오자 마구 질책했다.
박아윤은 의자에 앉아서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별거 아니에요. 아프지도 않아요.”
“몇 시에 나갔어?”
박정우는 가방을 꽉 채운 약초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4시쯤이요. 원래 아침으로 국이라도 끓여주려 했는데 시간이 빠듯하더라고요.”
그녀는 환하게 웃더니 한 손으로 가볍게 가방을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박서준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연약해 보이는 소녀가 어디서 이런 힘이 솟아나는 걸까?
박아윤은 태연하게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빠, 이 약초 좀 갈아주세요. 엄마 눈에 한 15분 정도 두껍게 발라주셔야 해요. 하루에 두 번씩 일주일 동안 꾸준히 발라주세요.”
박창진은 눈물을 글썽이며 보물을 다루듯 약초를 받아들었다. 그는 감개무량함과 동시에 마음이 측은해졌다.
“아윤아, 넌 우리 가족을 위해 너무 많은 걸 희생해. 우리 딸 착하지, 아빠 말 들으렴? 너는 그냥 행복한 공주님처럼 지내면 돼.”
“...”
그녀도 그렇게 지내고 싶지만 가난하고 아픈 가족들을 떠안고서 공주처럼 지낼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소녀 가장이 되어 가족의 행복을 책임지기로 했다.
[한 시간 뒤에 마을에서 나가는 길에 애들 몇 명 불러다가 아윤이가 사람을 구해주는 설정으로 해놔. 도움받은 사람이 아윤이한테 2억 원 주는 거로 해!]
박정우는 몸을 돌려 비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정우 오빠, 우리 이렇게 빈손으로 대표님을 만나러 가는 거 좀 그렇지 않아요? 제가 돌아가서 뭐라도 좀 챙겨올게요.”
박아윤은 박정우에게 억지로 끌려서 대표님을 만나러 가게 생겼다. 미래의 협력 사업에 대해 논의한다고 하는데 갑작스러운 급정거와 함께...
그녀의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
“앞에 누가 쓰러졌어요!”
박아윤은 황급히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뛰쳐나가 상황을 살폈다.
박서준은 본래 전용기를 타고 다른 지역 행사에 참여할 예정이었지만 귀엽고 말랑말랑한 동생과 더 오래 머물고 싶어서 끈질기게 이 낡은 차에 올라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박서준도 놀라 차에서 내렸다. 박아윤은 어느덧 의식을 잃고 쓰러진 노인에게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능숙한 심폐소생술을 받은 후, 노인은 점차 호흡과 심장 박동을 되찾았다. 창백했던 얼굴도 서서히 혈색이 돌았다. 노인은 눈을 반쯤 뜨고 떨리는 손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그... 그쪽이 날 구해줬어요?”
구급차가 도착했을 때, 노인의 가족들도 함께 왔다. 격앙된 감정을 이기지 못한 그들은 박아윤의 팔을 잡고 심지어 무릎까지 꿇으며 감사 인사를 하려 했다.
“감사합니다. 저희 어머니를 살려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여기 2억 원이에요. 이렇게라도 고마움을 표하고 싶으니 꼭 받아주세요.”
가족들은 그녀의 손에 수표를 쥐여주곤 구급차와 함께 쏜살같이 사라졌다.
박정우는 이마를 짚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고작 비서가 생각해낸 대본이라고? 황당해서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박서준도 억지로 웃음을 참느라 입술에 경련을 일으킬 지경이었다. 그는 박정우의 옆으로 다가와 둘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한테 말하지. 내가 좀 더 전문적인 배우를 찾아줄 수도 있는데.”
“꺼져.”
“넵.”
박서준은 금세 영화배우로 변신하여 충격에 빠진 듯 여동생의 손을 잡았다. 이 기회에 스킨쉽도 늘리고 더 친해지려는 의도였다.
“헐, 대박! 진짜 2억이야? 이런 종잇장에 2억이라고 쓰면 정말 2억이 되는 거야?”
영혼을 갈아 넣은 연기에 흠뻑 빠진 채 정작 박정우와 박아윤이 그를 바보처럼 쳐다보는 건 눈치채지도 못했다.
박정우는 문득 비서가 데려온 배우들도 연기가 나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각 박아윤은 내심 셋째 오빠가 안쓰러웠다. 고작 2억짜리 수표에 이렇게까지 흥분하다니.
하지만 이내 생각해보니 박씨 가문은 수년간 가난에 찌들다 보니 2억이란 금액이 엄청난 액수이기도 했다.
“네, 여기 이렇게 쓰면 바로 2억이 돼요. 이참에 한 번 만져봐요. 나중에 저분들께 돌려줘야 하니까.”
박아윤은 수표를 박서준에게 건넸다.
이때 박정우가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
“아까 그 어르신과 가족분들 옷차림을 보니 부유한 사람들 같던데. 네가 그 어르신을 구해드렸다고 고마움을 표하는 것일 뿐 금액은 전혀 신경 쓰지도 않더라. 그냥 마음의 표시라 생각하고 받아. 다시 만나지도 못할 거잖아.”
박아윤은 수표의 수취인을 가리켰다.
“오빠, 여기에 이렇게 적혀 있으니 은행 가서 알아보면 돼요. 힘들 때 도와주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저는 돈 보고 도와준 게 아니라 그냥 지나치기 싫어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뿐이에요. 이따가 경운시에 도착하거든 은행 가서 이거 돌려줘야겠어요.”
그녀는 이미 마음을 굳혔다.
비록 가족들에게 이 돈이 시급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한테나 받아서 쓸 순 없다.
박서준이 속으로 감탄했다.
‘역시 내 동생 최고야. 굳건한 의지에 쉽게 유혹에 빠지지도 않잖아. 임지효였다면 당장 은행 가서 돈으로 바꿔 달라고 난리도 아니었을걸.’
“서준 오빠, 울지 말아요. 돈은 나중에 벌면 돼요.”
박아윤이 수표를 돌려주겠다고 말하며 박서준을 올려다보았는데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녀는 오빠가 이 돈이 안타까워서 우는 줄로 여겼다.
박서준은 눈물을 쓱 닦았다. 그는 단지 박아윤의 말에 감동을 받았을 뿐이다. 고작 2억 원 따위, 그에겐 종잇장에 불과했다.
박정우의 차가운 얼굴에도 부드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가볍게 박아윤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아윤이 착하네. 우리 함께 노력하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