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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순간, 장내가 침묵에 잠겼다. 박아윤은 태도가 돌변하더니 아양을 떨면서 활짝 웃었다. “대표님이셨군요! 안녕하세요, 대표님.” 그녀는 도시락을 강민건의 앞으로 내밀고는 박창진을 향해 돌아섰다. “아빠! 여기 얼른 푸짐한 닭다리 하나 올려요!” 박정우는 말문이 막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대표님이라고 말하지 말걸. 동생이 강민건을 대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의 마음이 상당히 불편했다. 한편 강민건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꾹 눌렀다. 자꾸 표정이 바뀌는 박정우를 바라보면서 그가 입을 열었다. “이제 돈 안 받는 거야?” “무슨 그런 말씀을. 저희 오빠 대표님이면 저에게도 대표님이죠. 대표란 월급 주는 사람이고 이 세상에 돈 주는 사람은 무조건 좋은 사람 아니겠어요?” 박아윤은 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이를 지켜보던 박정우가 피식 웃었다. ‘얘가 상황 판단 능력은 타고났네, 타고났어.’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저쪽 한번 가봐.” 이제 더 이상 박아윤과 강민건이 어떤 형식으로든 엮이는 걸 지켜볼 수가 없었다. “알았어요. 무모하게 굴진 말아요. 여긴 오빠네 대표님 구역이니 내쫓으면 안 돼요.” 그녀는 떠나기 전, 목소리를 낮추고 발뒤꿈치를 들며 박정우의 귓가에 속삭였다. 동생의 세심한 배려에 박정우는 감탄을 연발했다. 불과 이틀 전에 집으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박아윤은 빠르게 박씨 가문의 생활에 녹아들었으며 가족의 생계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박정우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불쾌함만 안겨주는 강민건이 어느덧 사라졌다. 심지어... 도시락까지 챙기고 테이블 위에 현금 2만 원을 놓고 갔다. “강민건!” 박정우는 이를 악물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현금을 챙겼다. 이번 일은 아마 당분간 잊히지도 않을 것이다. 차에 탄 강민건은 재채기를 해댔다. 이에 기사가 센스 있게 냉방을 약하게 조절했다. 강민건은 차창 너머로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는 박씨 가문의 뭇사람들을 바라보다가 결국 박아윤에게 시선이 고정되었다. 이 여자한테서 왠지 점점 더 강한 친숙함을 느꼈다. “대표님, 어디로 모실까요?” 기사가 물었다. “회사로 가.” 강민건은 시선을 거두고 몸을 바로잡으며 말했다. “그리고 사람 시켜서 박정우 여동생 조사해. 두 시간 이내로 사무실에 서류 가져와.” 기사가 대답했다. “네, 대표님.” “이 타이밍에 운전을 왜 해?” 임지효가 임씨 가문에 돌아온 첫날, 김하정은 그녀에게 카드를 쥐여주며 그동안 밖에서 고생하며 지낸 보상이라고 했다. “내가 운전하라고 했어? 내 허락 없이 함부로 결정하지 마. 계속 이럴 거면 당장 꺼지던가.” 임지효는 오늘 예전에 사귄 부자 친구를 불러다가 한바탕 자랑을 늘려놓으려고 했는데 약속장소로 가던 길에 우연히 강민건을 발견하고 기사더러 여기까지 따라오게 했다. 강민건의 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임씨 가문의 기사도 당연히 임지효의 명령대로 따라갔을 뿐인데 된통 혼날 줄이야. 기사는 핸들을 꽉 잡고 있다가 별안간 박아윤이 떠올랐다. 단 한 번도 갑질한 적 없고 그들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존경과 배려를 보여주었었지. 임지효는 창문을 내렸다. 뭇사람들 중에 대체 누가 있길래 강민건이 직접 차에서 내린 걸까? 박아윤을 발견한 그녀는 쇼핑보다 더 흥미진진한 즐거움을 발견한 것만 같았다. “지효 씨, 어디 가시게요? 사모님께서 지효 씨를 꼭 잘 돌보라고 특별히 말씀하셨어요.” “무슨 말이 이렇게 많아? 차에서 얌전히 기다려!” 임지효는 기사가 따라서 내리려 하자 정색하며 쏘아붙였다. 그러고는 오전에 금방 산 샤넬 신상 정장을 입고 화려한 액세서리와 하이힐 차림으로 요염하게 박아윤의 곁으로 다가가 선글라스를 내렸다. “어머, 이게 누구야? 진짜 언니였네. 난 또 사람 잘못 본 줄 알았지!” “눈앞에 떡하니 있는 사람을 뭘 잘못 봐? 설마 그거 맹인용 선글라스야?” 박서준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야유를 날렸다. 박아윤은 한껏 차려입은 임지효를 바라보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도시락 1인분 4천 원이에요. 왼쪽으로 줄 서서 계산하시고 오른쪽에서 가져가세요.” 임지효가 선글라스를 벗고 시큰둥하게 코를 만지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언니, 다 내 잘못이야. 그때 엄마를 잘 설득해야 했는데. 그래야 언니도 이렇게 힘들게는 보내지 않을 거잖아. 나랑 같이 집에 돌아가서 사정해볼까? 언니는 우리 집에서 호의호식하는 데 익숙해져서 지금 같은 생활은 도저히 못 견딜 거야. 맞지?” 곧이어 그녀가 손수건을 꺼내 입과 코를 가렸다. 마치 공기 중에 정말로 끔찍하게 더러운 것이라도 섞여 있는 것처럼. 박아윤은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왼쪽으로 줄 서서 계산하시고 오른쪽에서 음식 받아가세요. 안 드실 거면 다른 사람 막지 말아 주세요. 부탁드릴게요.” “나 지금 기회 주는 거야!” 임지효가 버럭 화를 냈다. “진짜 이렇게 살고 싶어? 이번 기회 놓치면 평생 후회할 줄 알아.” 박아윤은 로봇처럼 여전히 하던 말만 반복했다. “왼쪽으로 줄 서서 계산하시고 오른쪽에서 음식 받아가세요.” “야, 박아윤!” “왼쪽으로 줄 서서 계산하시고 오른쪽에서 음식 받아가세요.” 임지효는 원한이 맺힌 눈길로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 네가 가여워 보여서 자비 베풀고 기회를 주는 거야. 이 기회 놓치면 정말 후회해도 소용없어!” “앞으로 갈 길은 멀었어. 너무 섣부르게 얘기하지 마라, 임지효.” 박정우가 차가운 얼굴로 박아윤 앞에 서서 말했다. “아윤의 말 못 들었어? 안 먹을 거면 길을 막지 말라잖아.” 임지효가 비웃었다. “오빠 아윤이 꽤 옹호하네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가 가장 아끼는 동생이라고 하더니 이제 와서 완전히 등 돌리고 모르는 척하는 거예요?” “가난해서 싫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더니. 네가 그러고도 인간이야?” 박서준이 쏘아붙였다. “친부모가 부자라고 하니까 두말없이 집 나간 건 너야. 키우던 개도 주인 가난하다고 싫어하진 않아. 개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쯧쯧.” “난 원래 임씨 가문 사람이에요. 그동안 박아윤이 내 인생 뺏어서 실컷 호강한 거잖아요. 누가 알아요? 오빠네들이 애초에 일부러 이렇게 계획한 건지! 누가 누구더러 인간이 아니래?” 뒤에서 조용히 있던 유선영은 그 말을 듣더니 가슴이 떨리고 울화가 치밀었다. “이런 배은망덕한 년! 왜 여태껏 네가 고작 이 정도였다는 걸 못 알아본 걸까?” 박아윤이 유선영을 부축하며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엄마, 화내지 마세요. 이미 다 지나간 일이잖아요. 이제 저도 돌아왔고 우리 가족 오붓하게 잘 사는 일만 남았어요. 저한텐 우리 가족이 가장 큰 재산이에요. 이제라도 우리 가족 품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 제게는 가장 행복한 일이에요.” 박서준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거렸고 박창진은 이미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착한 아윤이, 우리 딸 최고야.” 임지효는 그런 가족을 지켜보다가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한 가족이 아주 오붓하고 난리 났네요. 언제까지 가난 속에서 행복할 수 있을지 내가 끝까지 지켜볼 거예요!” “왼쪽으로 줄 서서 계산하시고 오른쪽에서 음식 받아가세요.” 박아윤은 또다시 기계적으로 반복했다. “꺼져!” 이에 임지효가 욕설을 퍼붓고 씩씩거리면서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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