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서고은은 손을 떨며 서동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락 안 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서동수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부녀 절연 협의서는 이미 보냈다. 이제 곧 말일이야. 오늘이나 내일 안으로 반드시 제주도로 가야 한다.”
“딱 하나만 물을게요.”
서고은의 목소리는 쉰 듯 갈라졌다.
“그때 나를 이시현에게 맡긴 게 당신이에요, 아니면 이시현이 먼저 나를 원했어요?”
“그걸 왜 묻지?”
“말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시현이야. 강남 프로젝트 하나랑 맞바꿨지.”
덤덤한 목소리로 서동수가 덧붙였다.
“어차피 너를 보는 것도 신물 나던 참이었고 서로에게 이득이었어.”
휴대폰이 “툭”하고 바닥에 떨어지며 화면은 산산이 부서졌다.
서고은은 갑자기 크게 웃었다. 텅 빈 별장 안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찢어질 듯 처절했고 그녀는 눈물이 흐를 때까지 웃었다.
“이시현...”
그녀는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정말 대단하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서고은은 모든 눈물을 닦아낸 뒤 방으로 향해 이미 정리해 두었던 캐리어를 끌고 나왔다.
문을 향해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걸음마다 칼날을 밟는 것 같았지만 발걸음은 놀랍도록 단단했다.
현관에서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주머니 속의 라이터를 무의식적으로 매만졌다.
이시현이 생일 선물로 준 그 라이터 위에는 그의 필체로 “To고은”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며 서고은은 망설임 없이 라이터에 불을 붙여 커튼 쪽으로 던졌다. 불꽃이 순식간에 치솟으며 거실 전체를 집어삼켰다.
서고은은 별장 밖에 서서 가만히 불길을 바라봤다. 함께 뒹굴던 소파, 입술을 맞췄던 식탁, 그리고 이시현이 아주 잠깐이나마 자신에게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순진하게 믿었던 그 침대까지. 모두 불꽃 속으로 사라졌다.
한 시간 뒤, 이시현이 돌아왔다.
검은 세단이 별장 앞에서 급정거하며 타이어 마찰음이 밤의 고요를 찢었다.
차에서 내린 이시현은 하늘로 치솟는 불길과 캐리어 위에 앉아 있는 서고은을 보았다.
그녀는 조용히 불타는 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빛이 서고은의 창백한 얼굴을 비췄고 속눈썹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이 맺혀있었다.
이시현의 가슴이 순간 조여 왔다.
쏟아낼 말은 수없이 많았지만 충혈된 서고은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모든 말이 목구멍에서 막혔다.
“집을 태웠네.”
그는 결국 낮고 무겁게 말했다.
“이제 속은 좀 풀렸어, 고은아?”
서고은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한때 사랑으로 가득 찼던 그 눈에는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텅 빈 적막뿐이었다.
서고은은 이시현을 보았다. 낯선 사람을 보듯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 대표님!”
비서가 급히 달려왔다.
“전용기 준비됐습니다. 스위스 쪽 회의는 더는 미루기 어렵습니다.”
이시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별장을 처리해 줘.”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서고은을 보며 덧붙였다.
“서고은을 강남의 집으로 데려다주고.”
“됐어.”
서고은이 마침내 입을 열었고 목소리는 거칠고도 단호했다.
“나는 집에 갈 거야.”
이시현은 그녀가 마침내 서씨 가문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 미간의 힘을 조금 풀었다.
“생각이 바뀌었다니 다행이야.”
그는 등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검은 트렌치코트가 밤바람에 휘날렸다.
“내가 항상 네 뒤처리를 해줄 수 있는 건 아니야.”
서고은은 그 자리에 서서 점점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입가에 쓸쓸한 미소를 띠었다.
그녀는 밤바람에 흩어질 만큼 가느다란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이시현, 우리 다시는 보지 말자.”
“뭐라고?”
이시현이 뒤돌아봤지만 그때는 이미 서고은이 택시 문을 열고 자리에 오른 뒤였다.
그는 그녀가 또 성질을 부린다고 생각했을 뿐 묻지 않고 그대로 차에 올랐다.
그는 알지 못했다. 두 대의 차가 앞뒤로 달리며 같은 공항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용기 계류장 앞에서 이시현은 비서가 건넨 서류를 받아 뒤돌아보지도 않고 기내로 올라탔다.
그리고 터미널 안에서 서고은은 반달 동안의 집세와 의료비를 모두 이시현에게 송금한 뒤, 휴대폰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제주도행 비행기 탑승구로 걸어갔다.
두 대의 비행기가 같은 시간 활주로를 박차고 서로 정반대의 방향으로 날아올랐다. 그렇게 다시는 마주할 일도 없이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