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서고은은 피 웅덩이 속에 쓰러진 채 시야가 점점 흐려져 갔다.
그녀는 이시현이 임단비를 조심스레 품에 감싸안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머릿속에 수많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처음 만났을 때, 금테 안경 뒤에서 얼음처럼 차갑던 이시현의 눈빛, 매번 날을 세워 맞서던 시절, 서고은이 이시현의 커피에 소금을 들이부었을 때조차 얼굴 하나 찌푸리지 않고 그대로 마셔버리던 그의 모습, 처음으로 이시현이 서고은을 사무실 책상 위에 눌러버렸던 날, 그녀가 너무 아픈 나머지 그의 어깨를 깨물었던 기억,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이시현을 점점 더 사랑하게 되었고, 그의 생일날, 별장 하나를 통째로 꾸미고 기다렸지만 들려온 건 임단비와의 스캔들이었다는 사실까지...
또 한 번은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서고은이 혼자 오 킬로미터를 걸어 엄마가 잠든 묘비까지 갔던 날, 하이힐에 발뒤꿈치가 다 까져 물집이 터져 피투성이가 되었을 때 그녀를 찾아낸 사람이 바로 이시현이었다.
이시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고은의 피투성이 발에서 하이힐을 벗겨내 한 손에 든 채 그녀를 업고 조용히 집으로 데려갔다.
그때 서고은의 눈물이 이시현의 목덜미로 흘러내렸고 그녀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평생 걸어갈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엄마가 떠난 뒤, 드디어 누군가가 서고은의 손을 잡고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그 모든 기억은 이시현이 임단비를 품에 안고 보호하던 그 순간으로 마무리되었다.
“삑.”
의료 기기의 규칙적인 소리가 서고은을 현실로 끌어당겼고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옆에서 울음이 섞인 임단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잘못이에요. 길 한가운데서 언니랑 다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냥 집에 태워다 주려던 것뿐이었어요... 시현 오빠, 왜 나부터 구해준 거예요? 언니가 알면 분명 화낼 텐데...”
이시현은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네 잘못 아니야.”
그의 목소리는 서고은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지나치게도 부드러운 음색이었다.
“다시 같은 상황이 와도 나는 여전히 너를 먼저 구할 거야.”
그는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너는 몸이 안 좋잖아. 더는 다치면 안 돼.”
잠시 멈췄다가 이시현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게다가 서고은이 화낼 이유도 없어.”
그 순간, 서고은의 가슴이 갑자기 조여 왔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심장을 움켜쥐고 마구 비틀어대는 듯했다.
‘나는 이시현에게 대체 어떤 존재일까? 나한테 화낼 자격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네. 이시현이 누구를 구하든 누구를 버리든 전부 이시현의 자유인데.’
“이제 그만 울고 돌아가서 푹 쉬어.”
이시현은 임단비를 다정하게 달래주었다. 그는 한참이나 부드러운 말로 그녀를 위로했고 그제야 임단비는 병실을 떠났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이시현은 고개를 돌렸고 그제야 서고은이 이미 깨어나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하지만 이시현의 얼굴에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로 말했다.
“외상일 뿐이야. 네가 예민하고 아픈 걸 싫어하는 거 아니까 최고 의료팀을 불렀어. 흉터는 남지 않을 거야.”
예전 같았으면 서고은은 분명 울고불고 난리를 치며 왜 임단비부터 구했냐고 따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저 담담히 말할 뿐이었다.
“그래, 고마워. 치료비는 반달 후에 갚을게.”
이시현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서고은이 고맙다고 말한 것도 이상했고 왜 자꾸 ‘반달 뒤’를 입에 올리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시현은 더 묻지 않았다. 그저 서고은의 고집스러운 성질이 도졌다고 가볍게 넘겼을 뿐이었다.
그 후 며칠 동안, 이시현은 낯설게도 모든 일정을 미루고 병원에 머물며 서고은을 돌봤다.
이상한 점은 서고은이 더 이상 예전처럼 이시현에게 매달리거나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고은은 조용히 치료받고, 조용히 밥을 먹고, 조용히 잠을 잤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이시현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 정도였다.
“아직도 화난 거야?”
서고은이 주사를 맞는 동안 이시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뭐가?”
“그날, 내가 너를 먼저 구하지 않은 거.”
잠시 말을 멈추다가 이시현이 이내 말을 이었다.
“단비를 구한 건 정황상 어쩔 수 없었어. 나와 단비는...”
이시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복도에서 갑자기 소란이 일어났다.
“무슨 일이에요?”
한 간호사가 급하게 뛰어가며 물었다.
“승조 그룹 대표님의 의붓딸이 계단에서 떨어졌대요.”
다른 한 간호사가 목소리를 낮췄다.
“방금 응급실로 실려 왔어요. 서 대표님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직접 안고 왔다더라고요. 의붓딸한테도 저렇게 정성이라니 진짜 좋은 분이네요...”
서고은은 고개를 들어 이시현을 바라봤다. 예상대로 그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처리할 일이 생겼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평소보다 훨씬 서두르는 듯했다.
“조금 있다가 다시 올게.”
서고은은 이시현이 급히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굳이 더 생각하지 않아도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었다.
지친 듯 서고은은 두 눈을 감았고 마음속이 모두 도려내진 것처럼 공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