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조하연은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전하.”
그녀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차가운 손가락으로 그의 용포 한 자락을 움켜쥐었다.
“청하는... 그저 주인을 염려하는 마음에 급해서 실수했으니 부디... 목숨만은 살려주시옵소서...”
소지헌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조하연의 얼굴은 종이처럼 창백했고 입가에는 핏방울이 맺혀 있었으며 이마의 잔머리는 식은땀에 젖은 채로 얼굴에 달라붙어 초라하고 연약해 보였다.
그녀는 그에게 단 한 번도 무언가를 청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옛날 그를 위해 칼을 막다가 목숨이 위태로웠을 때조차 깨어난 후에는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
“대군마마께서 무사하시니 정말 다행입니다.”
그녀가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애원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소지헌은 마음 한구석이 부드러워지며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죽을죄는 아니지만 벌은 면할 수 없다고 말하려던 찰나, 조연서가 갑자기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흐느꼈다.
“전하, 오늘 만일 하연이를 용서하시면 이후 신첩이 어찌 이 궁에서 위엄을 세우겠사옵니까? 모두가 중전이 나약하여 업신여김을 받고, 심지어 시녀까지도 중전을 거들떠보지 않는다고 할 것이옵니다. 신첩은... 신첩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나이다.”
말하며 그녀는 정말로 옆 기둥을 향해 몸을 던지려 했다.
“중전.”
소지헌이 그녀를 거세게 끌어안으며 호통쳤다.
“무슨 짓이오?”
그는 품 안에 거의 숨이 넘어갈 듯 울고 있는 조연서를 본 후, 다시 눈길을 돌려 바닥에서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조하연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결정을 내린 듯 다시 눈을 뜨고 단호하게 말했다.
“여봐라, 곤장형에 처하라.”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하여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차가운 그 한 마디는 마치 독을 바른 칼날처럼 조하연의 심장을 깊숙이 찔렀다.
“아니... 아니 되옵니다...”
조하연은 갈라진 목소리로 몇 마디를 뱉으며 기어이 기어가려 했으나 소지헌에게 제지당했다.
“조하연.”
그의 목소리에는 경고의 의미가 깃들어 있었는데 일말의 짜증이 섞여 있었다.
“고작 시녀일 뿐이다. 과인이 나중에 더 좋은 시녀로 보내주마.”
“아니 되옵니다. 전하, 신첩은 다른 시녀는 필요 없고 오직 청하만...”
“전하, 부디 은혜를 베푸소서.”
그녀는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애원했으나 소지헌의 눈빛은 차갑기만 했다. 그는 조연서를 지키기로 마음을 먹었다.
마당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오자 조하연은 온몸이 떨렸고 목구멍에서 피비린내가 감돌았다.
“풉.”
급한 분노와 등 뒤의 극심한 고통이 몰려와 조하연은 왈칵 피를 쏟았고 눈앞이 완전히 캄캄해지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요화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덕수가 곁을 지키고 있다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마, 드디어 깨어나셨습니다.”
조하연은 말이 없었다.
“전하께서 소인을 시켜 약을 가져다드려라 명하며 어명을 내렸습니다.”
이덕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마께서는 앞으로 몸가짐을 잘하시고 더는 일을 만들지 마시며 중전마마께 해를 끼치려는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마마, 궁에서 편히 쉬시며 몸조리하세요. 그리고 시녀 청하는... 이미 규정에 따라 처리했고 매장되었습니다. 전하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청하의 가족에게 위로금을 내려주셨습니다. 잠시 후 마마를 시중들 사람들을 새로 마련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들은 차가운 못처럼 그녀의 귓속에 박혔다.
조하연은 그 자리에 누워 눈을 멀뚱히 뜨고 천장에 새겨진 무늬를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덕수는 잠시 기다리다가 그녀의 반응이 전혀 없음을 보고 더 말을 이어가지 않고 약 그릇을 침대 머리맡 작은 책상에 놓으며 허리를 굽혀 물러나갔다.
전각 안에는 다시 정적이 흘렀다.
조하연이 눈을 감자 눈물이 눈가를 타고 흘러 내려와 머리카락 속에 스며들었다.
이후 며칠 동안 조하연은 혼이 빠진 꼭두각시처럼 탕약을 마시고 연고를 바르며 밥을 먹고 잠을 잤다.
등의 상처는 어의의 정성 어린 보살핌으로 점차 딱지가 앉았으나 마음의 상처는 햇빛도 보지 못한 채 곪아 터졌다.
그녀는 조용히 상처를 치료하며 시기를 기다렸다. 가사약이 발작할 그 날을 기다린 것이다.
이날 이덕수가 갑자기 찾아왔다.
“숙빈마마, 전하께서 마마를 교태전으로 모시라 하셨습니다.”
조하연이 일어나 그를 따라갔다.
길 위에서 이덕수가 작은 목소리로 최근 며칠 동안 일어난 일을 알려주었다.
“숙빈마마, 누군지 알 수 없으나 궁 밖에서 중전마마께서 오만방자하여 백성에게 함부로 곤장형을 치렀다며 중전이 될 자격이 없다는 헛소문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조정의 신하들이 상주하여 전하께 중전을 폐할 것을 청했습니다.”
“중전마마께서 이 소식을 듣고 잠시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시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셨습니다. 다행히 어의께서 밤새 애써 살리셨지요.”
“전하께서 크게 노하시어 온 궁궐 사람들을 교태전에 모아놓고 헛소문을 퍼뜨린 자를 반드시 찾아내어 엄벌해야 한다고 어명을 내리셨습니다.”
조하연은 그 이야기를 들고도 마음이 평온했다.
교태전에 도착하니 과연 수많은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소지헌이 위쪽에 앉아 있었고 조연서는 그의 품에 안겨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전하, 신첩은 억울하옵니다. 신첩은 결코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사옵니다...”
“과인은 알고 있소.”
소지헌이 다정하게 달랬다.
“과인이 반드시 밝혀내어 중전의 억울함을 풀어주겠소.”
소지헌이 고개를 들자 마침 문으로 들어선 조하연과 시선이 마주쳤다. 조연서의 눈물을 닦아주던 그의 동작이 잠시 멈칫했다.
조하연은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소지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
혼인한 후 지금까지 조하연은 소지헌의 앞에서 수많은 상처를 입었다. 중독되고 칼에 맞으며 물에 빠지기도 했다. 번마다 뼈가 부서질 듯 아팠지만 그녀는 소지헌 앞에서 눈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그는 우는 여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눈물로 그를 움직이지 못하며, 오직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눈물만을 닦아줄 것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조하연은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으며 연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소지헌이 자객의 습격을 받게 되자 그녀가 대신 몸으로 막아줬다.
상처가 심각하여 칼을 뽑을 때 심장을 찢을듯한 고통에 그녀는 눈앞이 캄캄해졌으며 식은땀이 속옷을 적셨다. 조하연은 끝내 참지 못하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사흘 동안 그녀 곁을 지키다 보니 소지헌의 두 눈은 퀭해졌다.
그녀가 우는 것을 본 그는 꾸짖지 않고 오히려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도 아프더냐?”
조하연은 멍해졌고 소지헌 역시 잠시 멈칫했다. 아마도 자신이 했던 옛말을 떠올렸나 보다.
그러나 그는 손을 거두지 않고 다시 한번 닦아주었는데 동작은 서툴렀으나 그녀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
그때부터 조하연은 그들 사이에 무언가 변했다고 느꼈다.
그는 그녀에게 잘해주기 시작했고 좋아하는 한과를 기억했으며 병들면 찾아왔다.
조하연의 마음속에서는 경보가 울렸다. 이 모든 것이 소지헌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가 주상이 되지 못하면 자신은 자유를 얻지 못하고 강남으로 돌아가 심정우를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싶었다.
다행히 그가 등극하자 조연서가 울면서 궁으로 그를 찾아왔고 그는 결국 조연서를 중전으로 맞이했다.
모든 것이 이전으로 돌아간 듯했다. 마치 그가 그녀에게 잘해주었던 모든 것이 착각이었던 것처럼.
그녀는 군중 속에 무릎 꿇고 조용히 기다렸다. 마침내 새벽이 밝아올 무렵 누군가 증거물을 소지헌 앞에 바쳤다.
“전하, 밝혀냈사옵니다. 헛소문을 퍼뜨린 배후 인물은... 숙빈마마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