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강가에 서서 밤새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날이 밝아올 무렵 암호화된 파일 한 통을 받았다.
자료 첫 페이지에는 눈매가 온순하면서도 애처로워 보이는 강다빈의 사진이 있었다.
강다빈과 서영훈의 모든 과거가 내 앞에 펼쳐졌다.
강다빈, 서울 강씨 가문에서 유일하게 밖에서 떠돌아다니는 사생아...
6년 전, 서영훈은 부하 직원의 배신으로 총 세 발을 맞았지만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겼다. 서영훈이 죽음의 위기에서 허덕일 때 바로 강다빈이 도운 것이었다.
그때부터 강다빈은 서영훈 생명의 은인이 되었고 서영훈은 목숨을 걸고 강다빈을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다음 장을 넘긴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그 장에는 서영훈의 목숨을 앗아갈 뻔한 습격의 주도자가 바로 강다빈과 그녀의 오빠라고 쓰여 있었다.
소위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기극이었다.
서울에서 권력을 휘두르며 그토록 철두철미한 서영훈조차도 졸렬한 사기극에 오랜 세월 동안 속아 넘어갔고 자기를 죽일 뻔한 여자를 보물이라고 여겼다.
여기까지 본 나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자료를 덮고 눈을 감은 채 난간에 기대자 문득 5년 전이 일이 떠올랐다.
집안에서 정한 정략결혼을 하지 않기 위해 홀로 서울에 왔지만 혼란스러운 뒷골목에서 불량배들에게 포위당했다.
바로 그때 서영훈이 신처럼 나타나 나를 지켜 주었다.
그 후엔 온 도시가 떠들썩할 정도로 미친 듯한 구애가 이어졌다.
사실을 알게 된 아빠는 크게 화를 냈지만 나는 창밖에 나를 위해 높이 쏘아 올린 폭죽 불꽃들을 보며 단호히 말했다.
“아빠, 영훈 씨는 달라요. 나 꼭 행복할 거예요.”
“이 내기에 내가 정말로 지면 돌아가서 정략 결혼할게요.”
그렇게나 단호하게 확신한 스스로가 우습기 짝이 없었다.
‘이제 정신 차리자! 온유진!’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어느새 또 흘러내린 눈물을 닦고 차에 올랐다.
몸은 여전히 미세하게 떨렸지만 핸들을 잡은 손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정적이었다.
별장으로 돌아가 얼마 되지 않는 내 소유의 물건들을 챙긴 후 완전히 서울을 떠날 생각이었다.
상대적으로 한적한 교차로를 지나갈 때 맞은편에서 차선에서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아무런 예고 없이 가속하며 미친 듯이 나를 향해 돌진해 왔다.
나는 운전석에 앉은 일그러진 창백한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강다빈이었다.
심장이 조여들 정도로 바짝 긴장했지만 생존 본능이 순식간에 발동해 오른쪽으로 급격히 핸들을 돌렸다. 차는 간신히 길가의 난간을 스치며 지나갔다.
내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과 가속에 미처 반응하지 못한 강다빈은 통제를 잃은 채 반대편 콘크리트 방호벽에 그대로 충돌했다.
차 앞부분이 순식간에 함몰되며 변형되었고 굵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핸들에 엎드린 나는 이내 이마에서 따뜻한 액체가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시야도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 순간 검은 벤틀리 한 대가 미친 듯이 질주해 오더니 길가에서 급제동하며 멈췄다.
헐레벌떡 차에서 뛰어내린 서영훈은 내가 있는 쪽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곧장 강다빈에게 달려갔다.
떨리는 손으로 변형된 상태의 뜨거운 차 문을 잡아당기며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다빈아! 다빈아, 괜찮아?”
여태껏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놀람과 두려움이 섞인 목소리였다.
웨딩 차량이 급발진을 했을 때, 납치범의 손에서 만신창이가 된 나를 찾아냈을 때조차도 이처럼 실성한 적이 없었다.
차에서 강다빈을 꺼내 품에 꼭 끌어안은 서영훈은 힘껏 액셀을 밟고 저 멀리 사라졌다.
차 브레이크등이 사거리에서 사라진 후에야 나는 꽉 쥐고 있던 핸들을 놓았다.
그래도 나에게 미련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작은 기대조차도 이 순간 산산조각이 났다.
마음이 완전히 죽는다는 말, 바로 감정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이 어떤 건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아프지 않았다. 그저 뭔가 텅 빈 것처럼 공허함과 추위가 밀려올 뿐이었다.
경찰차와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자 손을 들어 얼굴의 피를 닦았다.
창문에 비친 내 초라한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서영훈, 강다빈, 떠나기 전에 나도 두 사람에게 큰 선물 준비할 테니 기대해.’
병원에 가지 않고 바로 별장으로 돌아간 나는 이마의 상처를 간단히 치료한 후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필요한 자료와 신분증을 가방에 넣으려 할 때 방 문이 열렸다.
서영훈이 내 이마의 붕대를 보자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유진아, 다쳤어?”
지난 3년 동안 익숙히 들어온 긴장과 걱정이 담긴 말투였다.
어제 이 말을 들었다면 마음이 따뜻해졌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저 한없이 비꼬는 걸로 들릴 뿐이었다.
살짝 고개를 옆으로 돌려 서영훈의 손을 피한 나는 걱정스러워하는 서영훈의 시선을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
“강다빈이 그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병원에 같이 있어 주지 않고?”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서영훈의 눈빛도 미세하게 흔들렸다.
걱정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부드럽게 나를 바라보던 얼굴은 어느새 음침하고 잔뜩 어두워졌다.
“알았네.”
하지만 서영훈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일이 자기 통제에서 벗어나 살짝 불안해할 뿐이었다.
“뭘 알았는데?”
피식 웃었지만 눈물은 억제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
“99번의 결혼식을 한 목적이 원수를 끄집어내는 거라는 걸? 아니면 그렇게 한 게 모두 강다빈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는 걸? 그것도 아니면 나 온유진은 그저 서영훈이 유인용 밖에 내세운 살아 있는 과녁이라는 걸? 뭐, 그것도 아니면... 나를 무너뜨린 납치가 단지 강다빈이의 질투심 때문에, 어린애 같은 성격 때문이라는 걸?”
점점 높아진 내 목소리는 마지막에 치달았을 때 굴욕과 분노, 그리고 뼈가 시릴 듯한 한기가 담겨 있었다. 울부짖으며 뱉어낸 내 말에 안색이 완전히 어두워진 서영훈은 한 걸음 한 걸음 내 앞으로 다가왔다. 강력한 압박감에 나는 당장이라도 질식할 것 같았다.
“누가 말한 거야? 어디까지 알고 있어? 오늘 차 사고, 설마 일부러 낸 거야?”
나를 죽일 듯이 쏘아보는 서영훈의 시선에도 나는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서영훈, 항상 내가 똑똑하다고 칭찬했잖아? 설마 내가 멍청하게 가만히 앉아 죽음을 기다릴 거라고 생각했어? 이 결혼, 절대 안 해! 못 해! 나 당장 떠날 거야!”
“떠난다고?”
갑자기 냉소를 지은 서영훈은 손을 뻗어 내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온유진, 여기가 어딘지 잊었어? 네 마음대로 들락날락할 수 있다고 생각해?”
갑자기 자기 품속으로 끌어당기더니 나를 내려다봤다. 더 이상 보여주기식의 사랑 따위 남아있지 않은 눈빛에는 무정함과 통제력만이 남아 있었다.
“결혼식은 반드시 정상적으로 진행해야 해. 그 사람들을 다 처리하고 다빈이가 완전히 안전해지면 그 후에...”
잠시 멈칫한 서영훈은 잔인한 표정을 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너는 떠날 수 있어.”
온몸이 얼어붙은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서영훈을 바라보았다.
“그전까지 어디도 갈 생각하지 마. 조용히 내 신부 노릇이나 해.”
말을 마친 서영훈은 더 이상 나를 보지도 않은 채 문밖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사람 불러서 온유진 방으로 데려가! 결혼식 전까지는 별장 밖에 한 발짝도 내보내면 안 돼.”